오늘 한 일들을 생각해봐도 그렇고, 현재 상태를 객관적으로 봐도 그렇고, 나는 분명히 피곤하다. 그런데 마치 커피를 늦게 마신 것처럼 눈이 감기지 않는다. 잠을 너무나도 자고 싶으면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는 아니다. 정말로 자고 싶으면,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면 잠이 오게 되어 있다. 단지, 눈을 안 감고 있을 뿐. 참고로 커피는 최소한 한 달 동안은 마시지 않았다. 이건 분명히 가을이 되면 기분이 들뜨는 현상이 찾아온 탓이다. 역시 가을부터 겨울까지 나는 활동적이게 된다. 기분이 가라앉는 계절인 봄, 여름에도 기분이 우울했던 기억은 거의 없다. 단지, 기쁘더라도 감정 표현을 겉으로 크게 하지는 않을 정도로 차분함이 유지되는 편이다. 가라앉는 계절에 내가 크게 웃거나 하는 일은 그냥 일상 속의 자기 만족을 제외하면, 친한 누군가를 놀릴 때나 있다. 그런데 가을이 되면 그냥 아무 이유 없이도 잘 웃는다. 벌써 그 계절의 기운이 느껴진다. 또 일기나 쓰고 자야겠다. 이렇게 연속으로 일기를 쓴 일은 이제껏 없었다. 어릴 때 일기를 쓰는 습관을 아주 잠깐 가진 적이 있었는데, 읽고 듣고 쓰고 말하는 언어가 대부분 영어이던 시절의 일이다. (물론 말하기를 제외하면 지금도 그렇고, 쓰는 것은 스팀잇 덕에 반반이 되었다.) 그 때문에 뭔가 아쉬움을 느꼈는지 유독 일기만은 한글로 쓰기 시작했는데, 금새 그만두었다. 부모님이 훔쳐보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혼자 사는 것이 좋은데... 어쩌면 거처를 옮겨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모처럼 수도권을 떠나서 바다 있는 곳을 왔는데 말이다. 게다가 아버지 명의 집이라 세도 없고 평수도 크다. 사실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크고, 그래서 좋다. 예전처럼 수도권에서 이 정도 크기의 집을 빌려서 살기는 싫으니 이사를 가지 않는 것이 최선인데, 며칠 더 두고 봐야겠다. 오늘 우연히 댓글로 얘기하다가 깨달은 사실인데, 나는 글을 그 자체로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내가 무게를 두는 것은 생각이고, 글은 그 표현일 뿐이다. 잘 읽히는 글, 예쁜 글, 따뜻한 글, 또는 논리정연한 글 등, 일명 '좋은 글'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내가 가진 생각을 스스로 잘 이해하는 것만이 글쓰기의 실질적인 목표이며, 추가적으로 그 생각을 좋아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 결과 나오는 글이 친절하든 아니든, 남들이 보기에 어떻든, 내 생각의 표현으로서 만족하면 된다. 학위 논문을 써봤으니 남을 설득하는 글에도 익숙해야 마련인데, 생각해보면 그때조차 그냥 내가 빠져 있는 사상을 설명하는 재미가 목적이었다. 내가 당연히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일부 남들에게는 아닐 수도 있는데, 이는 대학원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이다. 나는 그것을 고려한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어차피 심사를 하는 담당교수의 수준은 충분히 높았고, 애초에 그럴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를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논문을 쓰기 전부터, 가장 중요한 독자를 선택한 셈이다. 어차피 일정 이상의 깊이를 요하는 주제에 대한 글이 모든 사람의 눈높이에 맞을 수는 없다. 물론 그걸 목표로 쓸 수는 있다. 하지만 보편적인 이해가 가능한, 또는 그런 이해를 목표로 하는 글보다는 그냥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집중하는 글이 쓰기도, 읽기도 재미있다. 물론 내가 매번 후자를 택하는 이유가 재미만은 아니다. 그렇게 쓰지 않으면 속터져서 못 쓸 것 같아서이다. 나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을 미술이나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본다. 글은 그냥 생각의 표현이고, (비록 이유는 제각기 다르겠지만) 그것을 좋아할 사람들은 좋아할 것이다. 물론 싫어할 사람은 싫어할 것이고. 미술이나 음악적 표현에 대해서는 왜 남들을 설득하거나, 공감시키지 못하냐고 훈계질하기 어려운데, 유독 글에 대해서는 뭔가 그걸 봐줄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의무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배려적인 글이 정말 그 저자의 색깔에 맞는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글이 그림이나 음악보다 더 직접적인 언어이기는 하지만, 독보적인 위치에 있지는 않다고 본다. 글의 주제와 깊이에 따라서 이해가 쉬운 글도, 어려운 글도 있을 터인데, 세상 그 무엇이든 간에 설명만 잘 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정보성 자체가 목표가 아닌 이상에야, 내게는 자신의 생각에 가장 맞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즉 글의 표현력이 불특정 다수에 대한 전달력보다 훨씬 중요하다. 아, 여기에서 표현력이란 자신의 생각을 얼마나 잘 반영했냐의 문제이지, 얼마나 아름답거나 쉽게 전달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글에는 각자의 독자층이 있고, 전달은 그들에 맞추어서 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정해진 독자층에 맞춰서 얻을 수 있는 장점 딱 하나만 들라면, 훨씬 솔직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 있다. 물론 정해진 독자층은 유동적이고, 생물과도 같다. 즉 처음에는 좁았더라도, 넓어질 수 있다.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서 독자층이 넓어지는 것 외에도, 꾸준히 자기 표현을 하면 끌려오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글을 더 많은 이들에게 맞추는 쪽으로 바꾸어서가 아니라, 글의 수용 환경을 바꾸는 것을 통해 가능해진다. 사실 이 부분은 출판물 대신에 블로그에서 글을 쓰는 것의 장점이기도 하다. 내 글에 으레 따를만한 독자층에 원래는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관계"에 의한 흥미로 읽어주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읽다 보면 더러는 글에 익숙해지기도 할 것이다. 나는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그것을 읽을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내 글에서 공감의 지점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바라거나, 더 잘 해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내 글은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자기중심적인 글이다. 오히려 그래서 보편적인 공감대를 이룰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이 목표는 아니다. 글은 그냥 생각의 표현이고, 나는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 표현이 자아낼 반응들은 무슨 짓을 한들 있을 반응들이니, 미리 의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가진 생각을 표현하는데 주력하면, 모든 이는 아니더라도 일부를 끌어당길 수 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그 일부는 언제든 확장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결과적인 일일 뿐이고, 글은 일단 나를 위한 것이다. 뭐 힐링이나 그런 효과를 얘기하는 분들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잘 모르겠다. 그냥 가진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내 습관이다. 심지어 댓글 등으로 대화를 하는 순간에도, 1차적인 목표는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다. 남의 생각을 아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얘긴 아니지만, 결국 남에게서 보는 모습이 내 거울이 되기 때문에 관심이 가는 것이다. 그 거울을 보고 서로 공통점 혹은 차이점을 확인하고, 그러고 지나가는 것이다. 물론 남을 관찰하는 것도 꽤나 좋아하기 때문에 2차적 목표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목표라기에는 그냥 일상적 습관이겠지만. 그러고 보니 최근 마나마인 인터뷰에서도 '소통'을 그렇게 얘기했던 것 같다- 자기 실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소통이라고. 막상 이렇게 표현하니 오글거리지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일단 자기가 있어야 남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기반으로 해서 남과의 관계를 결정하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자기 실현이 남과의 소통과 공감에 강하게 기대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고, 소통과 공감을 추구하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일단 나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 일단은 표현하고 내놓는다. 그리고 나서 그걸 기반으로 가능해지는 소통을 한다. 헨리 제임스를 비롯한 진짜 글쟁이들도 제각기 자신의 글에 대한 생각을 밝힌 바 있는데, 혹여나 그중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 있나 찾아봐야겠다. 그들은 주로 글쓰기 '기술'을 논했지만, 그건 결국 '예술'도 뜻하는 'art'였다. 뭐 거창하고 위대한 것만 예술은 아니니, 기본적인 기술이 갖춰졌다면 결국 자기 표현이라는 의미에서 예술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예술의 품질은 둘째치고 말이다. 음...이 글은 의식의 흐름에 따른 일기였는데 오늘따라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않고 있다. 일단 예술, 하니까 영화가 생각난다. 최근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딸인 한 여배우가 성추행 시비에 휘말렸다는 얘길 들었다. 아르젠토는 컬트 영화를 여럿 만든 감독으로, 주 장르는 호러다. 그의 아버지, 그러니까 문제의 여배우의 할아버지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제작자였다. 이탈리아 영화계에서는 나름 거물 집안이라고 봐야겠지. 집안 분위기에서 신인에 대한 태도를 배우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내에서도 비슷한 문제로 구설수에 올랐던 연출가가 있었고 그의 딸까지도 함께 거론되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건지. 그냥 평화롭게 흘러갔나보다. 이제 잠이 오는 것 같다.가을이 느껴져서 기쁜 표정의 대문
기분이 언짢은 게 아니다. 차분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