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는 아니고, 군인 썰 하나.

[반말주의]

스팀잇 시작할 때 (그래봤자 2주쯤 전이지만) @heterodox의 글을 하나 봤어. 지하철 내에서 군인이 모자 벗은 것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에 관한 글.

나야 국방의 의무가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역이나 대합실에서는 모자를 벗으면 안 된다는 것 같더라.

그 글 보고 떠오른 썰이 있어서 한번 풀어보려고.

내가 대학생일 때, 어떤 사관생도랑 약속이 생겼어. 어느 사관 학교인지까지는 말하지 않을게, 어차피 몇 개 없으니까.

나는 솔직히 말해서 누구 한 사람을 자주 보는 게 좀 안 맞는 성격이야.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데, 일반적인 연애는 너무 자주 만나야 되더라. 귀찮아...

사관학교 생도는 주말 밖에는 못 만난다고 그러더라? 뭐, 나한텐 그게 장점이었어.

그런데 만나기로 한 날, 그 애들은 그런 일이 자주 있나 보던데...선배들한테 잡혀서 예정했던 것보다 늦게 보게 됐다.

그래서 걔가 학교에 들어가 봐야 되는 시간이 다 된 거야. 다음에 보자고 했는데 지하철역에서 잠깐만 보자고...

그건 좀 그렇지 않나 싶었는데, 어떻게 보면 계속 볼 사람일지 아닐지도 모르면서 한 주를 또 연장해서 다음 주말을 기약하긴 또 싫더라.

솔직히 걔도 그런 생각인 것 같았어. 좀 웃기지만 이해는 갔지. 걔는 주중에 나오지도 못하고, 매 주말이 그야말로 휴가잖아.

그래서 역으로 갔는데, 솔직히 다들 그런가? 나중에 봐도 못 알아볼 정도로 제복하고 모자 밖에 안 보였어. 키는 크다는 정도의 인상.

근데 어지간히 성격이 급한 애였는지, 다음 주에 시간을 제대로 내서 다시 볼 건지 아닌지를 말해 달라는 거야.

아니, 좀 당황스럽잖아. 그냥 미안하다, 시간이 없어서 다음 주에 다시 보자, 하고 헤어졌으면 되었을 텐데,

마치 다음 주에 또 볼 만큼 자기가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를 말해달라는 식의 이야기가 된 거야. 그러면 거기서 어떻게 하냐.

내가 만약에, 네, 다음 주에 봐요, 그러면...일단 너 괜찮은 것 같으니 계속 만나볼 생각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들더라.

"나만 정하면 돼요?" 했더니 돌아오는 답이...

"어, 너만 정하면 돼."

이건 뭐 무슨 결정의 부담을 나한테 짊어지운 셈이잖아. 아무리 자유가 좋다지만 사실 전적으로 내게 달린 결정의 자유란 건 상당히 버거운 거라고.

“집에 가서 문자로 알려드릴게요,” 했더니...

아니, 당장 자기랑 헤어지자마자 문자를 달라는 거야.

뭐야...

솔직히 어떤 사람인지 성격을 모르니까 결정하기 힘들었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어차피 두어 시간 앉아서 커피를 마셨더라도 모르는 거야, 그건.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솔직하게 얘기했어.

"모자 한번 벗어봐 주실 수 있어요?"

아니, 잠깐 보고 알 수 있는 게 얼굴 밖에 더 있냐고.

나도 모르겠어. 그냥 서로 모르겠으니 다음 주에 일단 보자고 하면 될 것을...굳이 나한테 지워준 결정의 무게가 짜증났나봐.

'적어도 너 다음에 알아볼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니?' 정도의 심정이었어.

그랬더니, 자기네는 모자 벗으면 안 된대.

거기가 지하철 역 안이었거든. 자기 학교 선배들도 왔다 갔다 하고.

근데 뭐 어쩔 거야. 잠깐 벗어 보일 수밖에 없잖아.

그래서 그렇게 했어.

근데 진짜 모르겠더라. 마음에 안 든다는 게 아니라, 그 짧은 시간 안에 걔의 귀중한 다음 주말을 쓰라고 하면서 다시 보자고 할 만큼 마음에 드는지 진짜 모르겠더라고.

아,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는 뜻인 건가.

아니면 그 나이 대에는 한눈에 반할 사람을 찾고 싶은 생각이 있는 걸지도 모르지. 솔직히 난 조금은 그랬던 듯.

하여간 걔는 학교로 가고, 나는 집으로 가면서 폰을 계속 만지작거렸어. 이거 뭐 문자를 뭐라고 보내야 하나...자기가 가자마자 문자를 달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 모든 심정을 다 담아서 장문의 문자를 작성했다?

싫다는 게 아니라...짧은 시간 안에 솔직히 파악이...그렇게 결정하기가 힘들다...어쩌고 저쩌고.

뭐 결국 보지 말자는 얘기인 거지.

몇 번을 지우고 쓰고 반복하다가, 마음에 드는 문자가 작성이 됐어. 이 정도면 예의도 지켰고 의사도 확실하게 전달이 되고.

내가 봐도 진짜 만족스러운 문자였어.

근데 딱 보내는 순간 그때 걔 문자가 딱 온 거야.

"빨리 답 줘"였던가, 뭐 그런.

깜짝 놀라서 길에서 허둥지둥 하다가 작성하던 문자 저장 확인을 못 누른 거야.

와, 순간 진짜 화났어,

도저히 다시는 못 쓰겠고, 해서 그냥 딱 한 마디 보냈지.

"죄송해요"

몇 분 후에 답이 오더라.

"괜찮아. 근데 혹시 우리 학교 사람 만나면 내 얘긴 하지 말아줘"

자기네 학교 생도를 또 만날 거라고 생각을 한 건가...사실 걔 말고 또 만나볼 생각이 있기는 했는데.

그러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났어.

어느 날 지하철을 타러 갔는데, 어떤 사람이 유심히 계속 쳐다보는 거야.

그러더니 지하철을 타고 나서 말을 걸더라. 예전에 자기 본 적 있지 않냐고.

도저히 모르겠던데...걔가 학생증인가를 꺼내서 보여주더라. 아, 기억이 나더라.

그러더니 또 물어. 남자 친구 있냐고. 그때 내가 누굴 사귄지 일주일 됐었거든.

그래서 그렇게 말했더니...약간 내가 보기에는 실망한 얼굴로 이러는 거야.

"뭐, 제가 더 일찍 만났네요. 전 몇 달 됐는데."

뭐지, 자기를 거절해서 쉽사리 누굴 못 만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하여간 재미있었어.

집에 와서 전화로 당시 남자친구한테 그 얘길 했더니, 처음엔 모르는 사람이 말 걸려고 한 거라고 생각해서 화를 내더라.

아니, 진짜로 한번 만났던 사람이라고 했더니 어이없어 했지.

나도 좀 어안이 벙벙했어.

20151215_092821.jpg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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