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주의]
언젠가 썼듯이 난 외국에서 자랐고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한국인은커녕 동양인 자체가 드물었어. 예민한 10대 시절의 내가 제일 싫었던 건, 동양인이라서 무조건 얌전하고 순응적일거라는 그런 선입견이었어.
그곳에선 실제로 동양인이 주변에 거의 있지도 않았던지라 매체에서 보는 그런 공부벌레 이미지가 더 강했겠지? 난 그게 너무 싫더라. 지금은 상관없어. 나만 아니면 됨
그래서 나는 내키는 것 이상으로 심하게 당당하게 굴었던 것 같애. 선생이 짜증나면 그냥 나가버린다거나, 누가 나를 고깝게 보는 것 같으면 먼저 공격한다거나. 학교에서는 내가 성적은 좋으니까 전형적인 문제아처럼 다루질 못해서 좀 애먹었을거야. 지금 생각하면 다 어릴 때의 치기다.
사춘기 때라서 안 그래도 이런저런 다툼도 많고 치정 사건(?)도 많고 하기 마련인데, 어떤 여자애가 뒤에서 수군댄다는 이유로 머리채 먼저 잡은 적도 있고, 따르는 애들이 많은 만큼 적들도 많았지. 원래의 내 성격은 그냥 차갑고 무관심한 성격인데, 피곤한 생활을 자처한 듯.
한국에서는 공부 하나로 애들이 잘 못 건드리는 경우가 많지만, 내가 살던 곳에서는 그거 하나로 안 됐다. 운동을 아주 잘하거나, 인기가 많거나, 하지 않으면 공부만 잘해갖고는 언제 괴롭힘 당할지 몰라 주눅들어서 학교 다녀야 된다. 적어도 그땐 그랬어. 나는 몇 번의 겉담배 외에는 무슨 심한 불량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절대 초식 동물로는 살고 싶지 않았어.
근데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원래 그런 걸 다 귀찮아하는 사람이라는거야. 어쨌든 소수 인종이니까, 누가 우습게 보기 전에 일부러 세게 나가고 그런거, 사실 안 해도 된다면 안 했겠지. 근데 그 과정에서 얻은 얄량한 인기가 중독적이기도 해서 그만둘 수도 없었어.
그리고 나는 진짜 고전 문학이나 옛날 영화, 클래식 음악 좋아하고 정적인 사람이라서, 다른 애들이 즐기는 문화는 재미가 없었어. 근데 자기네들한테 공감 못하는거 알려지면 내 이미지가 망가질까봐 집과 학교 사이에서 이중 생활을 했지.
그렇게, 겉으로 되게 당당한거 같지만 항상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급급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게 너무 지긋지긋해. 그래서 지금의 나는 남한테 잘 보이려고 하거나 남 의식해서 행동하는거 너무 싫어해. 너무 지겹게 해봤거든.
한 여자애가 있었는데 이름이 에밀리였어. 걔는 밥 말리나 비틀즈를 좋아하고, 옷 못 입고, 뭔가 어두운 인상이었어. 머리가 자연적으로 곱슬이었는데 너무 부스스하니까 무스 같은걸로 고정을 하고 다녔거든. 근데 설상가상으로 여드름 피부라서, 항상 피부 색깔과 많이 다른 여드름 약 같은걸 바르고, 그 위에 기름기 있는 곱슬 머리로 가리기까지 하고 다녔지. 공부는 잘 했지만 언제 못된 애들이 시비 걸지 몰라서 주눅들어서 다니는 딱 그런 애였어.
과목마다 우등반이 따로 있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는 걔랑 이야기할 기회가 종종 있었고, 그래서 걔만큼은 내 실제 음악이나 책 취향을 알게 됐어. 자기하고 그나마 비슷한 면이 많다는 것도. 나도 내 친구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는 걔랑 얘기하는게 좋았지. 물론 같이 다니거나 하진 않았어.
문제는 과학 시간은 성적으로 반을 나누질 않았는데, 보통 두 명 씩 짝을 지어서 실험을 하거든. 근데 에밀리 짝이 어느 날 안 온거야. 걔는 혼자 앉으면 또 못된 애들이 시비 걸까봐 되게 두려운 것 같더라.
근데 나는 이 시점에서 짜증이 난 거야. 애들이 살짝씩 시비 거는 것도 못 견디는 에밀리의 멘탈도 짜증이 났지만, 그것보다는 사실 나도 걔를 좋아하면서 당당하게 같이 앉자고 하지 못하는 게 더 짜증이 났어. 그래서 걔가 무리해서 나랑 내 원래 짝이랑 같이 3명이서 앉았을 때 짜증을 냈어. 실험은 짝이 없으면 혼자 하면 되거든.
내가 걔랑 친한 이미지로 보이는게 싫어서였을까, 아니면 걔가 나약한 게 싫어서였을까. 둘 다였겠지.
근데 내가 걔랑 같이 앉는걸 꺼려한다는걸 다른 애들이 눈치 챈거야. 그 중에는 내가 전에 다른 글 막판에 언급한 닉이라는 초등학교 동창도 있었는데, 내 뒤에 앉아 있었어.
초등학교 땐 나름 친했는데 커서 멀어진 경우라서, 걔는 항상 비뚤어진 심술 비슷한 관심이 있었지. 걔가 딱 알아챈거야, 내가 에밀리 때문에 뭔가 화가 나 있다는걸.
그래서 닉이랑 걔 친구랑 둘이서, 실험할 때 쓰는 나무 젓가락 비슷한걸 잘게 부숴서 에밀리 머리에 던지기 시작한거야. 심한 곱슬이다 보니 머리에 막 엉퀴어서 붙어버렸어. 에밀리 걔는 얼마나 소심한지 하지 말라는 소리도 못 하고 털어내면서 분을 삭이는 것 밖에는 못하더라.
거기서 내가 딱 하지 말라고 한 마디만 해줬으면 됐을텐데, 난 그때 못 본 척 했고 심지어 약간 웃기까지 했어. 눈치 없이 옆에 붙을려는 에밀리한테 짜증이 난 상태에서 다른 애들이 좀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치기 시작하니까 맥이 탁 풀렸나봐. 아니면 내가 그냥 악한 인간인건지도.
어쨌든, 꼭 내가 직접 한 건 아니지만 내가 던진 것처럼 됐어. 닉이랑 그 친구는 내 눈치 보고 한거니까.
그렇게 해서, 어쩌면 나랑 거의 유일하게 말이 통할 수 있었던 친구를 잃어버렸다. 나는 내가 구축해온 이미지를 선택하느라 걔를 버린거지.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걔만 생각나면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누군가 한 사람이 다수에게 당하는 거 보면 제일 걱정되고 화가 나. 그 한 사람이 설령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혼자인 이상 나는 절대 거기 가세하지 않아. 그리고 가능하면 두둔하려고 해. 잘못했더라도 이런 방식은 아니라는 식으로라도 말이야. 물론, 그런다고 어리석던 어린 날의 일들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