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둘째 날
새벽이 되자 손 근처에서 진동이 울렸다. 알람이 혹여나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될까 봐 손에 쥐고 잤던 휴대폰이었다. 대부분 짐은 미리 가방에 정리하고, 다음 날 입을 옷으로 갈아입은 채 잠들었지만, 가방에 침낭을 말아 깊숙이 넣는 일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깜깜한 방안에서 침낭을 말아봤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황급히 모든 소지품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
밖은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헤드 랜턴에 의존해서 주방에 간 후에야 마음껏 소리를 내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사람들 대부분은 크래커에 홍차 한잔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출발하지만, 아침은 따뜻한 국물로 시작하고 싶었던 우리는 라면을 종류별로 들고 갔었다.

아침은 면, 점심은 전투 식량, 저녁은 햇반에 참치, 김

물 끓이고 라면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새벽에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도 숙소를 출발할 땐 이미 밝아 있었다.

둘째 날은 클린턴 헛에서 민타로 헛까지 걷는 16.5km 여정이다. 오전 7시쯤 출발했는데 중간에 쉬고 점심도 먹고 하다 보니 민타로 헛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쯤이었다.




처음 2시간은 이끼가 가득 낀 숲길을 걸었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처럼 나무가 살아 움직이고 어디선가 잘생긴 엘프가 나타날 것만 같은 숲이었다. 가끔 새가 우리에게 다가왔는데,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기색이라 더 신기했다. 2시간 정도 걸었을 무렵 고사리밭이 나왔는데, 동그랗게 말린 부위가 주먹만 한 크기의 고사리를 보며, 대체 한국에서 먹던 고사리는 어떻게 생긴 것이었는지 궁금해졌다.

분명히 이끼가 가득한 숲을 걷고 있었는데, 나뭇가지로 뒤덮인 터널 같은 공간을 지나더니 거짓말같이 탁 트인 곳이 나왔다. 시야가 넓어져서일까? 파란 하늘을 만나서일까? 왠지 자유를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맑은 냇물에는 송어가 사는데 너무 빤히 보여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낚시는 별도의 허가증을 요구한다.




대화할 때도 있고, 묵묵히 걷기도 하고, 잠시 서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렇게 또 한참 걷다 보니 어느새 쉼터가 나타났다. 낮고 긴 의자가 몇 개 있었지만, 사람들 걷는 속도가 비슷하고 대부분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기에 땅바닥에 앉아서 버너에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불을 피워 네 명 분의 물을 다 끓이고 나니 그제야 자리가 생겼다. 이날 내가 먹은 것은 비빔밥 형태의 전투식량이었는데, 나름 안에 된장국까지 들어있어 좋았다. 비빔밥은 외국에서도 유명해서인지 내 전투식량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까지는 약 2시간을 더 걸어야 했는데, 이곳부터 경사가 있어 힘들었다. 곧 버스 정류장이라고 쓰여 있는 작은 쉼터가 나왔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버스가 다닐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었기에 대체 이곳에 왜 버스 정류장이 있으며, 실제로 버스가 온 적은 있었던 것인지 궁금했다. 조금 더 걷자 돌무더기로 인해 길을 알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아무래도 산사태가 있었던 것 같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바닥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화살표가 왠지 위로 향하라는 것 같아 무작정 걸어갔다. 다행히 그곳에서 다시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맑은 시냇물이 보일 때 물통에 물을 채웠지만, 어느 순간 시냇물이 나오지 않았고 오르막길을 계속 걷다 보니 목이 말라 어느새 가지고 있던 내 물은 물론 일행들의 물도 다 마셔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할 즈음에 가이디드 투어 산장의 표지판을 발견했는데 다행히도 그곳의 수도꼭지에서 물을 보충할 수 있었다.


물을 받고 다시 걷는데 어느 순간 물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가보니 폭포와 시냇물이 있었다. 그곳에 앉아 지친 발을 차디찬 물에 담그고 몇 번이고 세수를 하고 다시 걸었다.

민타로 헛에 다다를 때쯤에는 노란 버터컵 꽃이 가득한 꽃길이 계속되었다. 그 길이 너무나도 예뻐서 동영상을 촬영하며 걸었는데, 그 당시 휴대폰으로 찍은 동영상은 화질도 좋지 않고 걸으며 찍었더니 도저히 어지러워서 볼 수가 없는 영상이 남고 말았다. 차라리 차분하게 서서 꽃을 찍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민타로 헛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은 후 각자 씻을 곳을 찾아 헤맸다. 나와 남편은 더 걷기 귀찮아서 화장실 세면대의 수도꼭지에서 머리를 감고 물을 적신 수건으로 대충 닦아냈고, 친구 부부는 언덕 아래에 있는 호수에 들어갔다 나왔다. 이곳의 물은 모두 빙하가 녹은 물이라 그런지 수돗물도 호숫물도 씻고 싶지 않을 만큼 차디찼던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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