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반구가 제거된 실험용 쥐와 전극이 꽂힌 채 머리뼈가 개방된 원숭이의 실험 결과를 찍어놓은 동영상을 살펴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가 가진 반려 동물의 단어 중에서 '반려'의 의미는 더욱더 확장되어야 한다고. 실험용 쥐는 태어날 때 유전적으로 조작되지 않으면, 보통 외과적 처치를 받아야할 운명이다. (제아무리 빛으로 유전자의 활성을 조절하는 Optogenetics 라고 하더라도, 광섬유를 뇌에 박아야하거나 on-off 스위치 정도 유전자에 마련해주어야 하는 것은 똑같다.) 물론 그 두 개가 모두 일어나기도 한다. 무언가 결핍되어 있어야 결과를 비교하기가 쉽다. 여러가지 요인들이 한데 붙어 있으면 분석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원숭이는 인간과 닮았다는 이유로 혹사당하곤 한다. 작업 수행을 하거나 뇌파 같은 것을 측정할 때, 지능이 필요한 실험에서 쓰인다. 실험용 동물들은 모두 쓸모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화장품에서, 약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기초 실험에서 훌륭한 도구가 되어준다.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는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것은 인간에 대해서 '반려'일까.
나는 우리가 바라보는 동물의 위치에 층위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키우는 동물은 아무래도 높은 우선 순위를 가지고 있다. 길거리에 나다니는 동물들은 어떨까. 그들이 우리 눈에 뜨인다면 (그 것이 귀엽게 생겼다는 가정하에) 상당히 높은 순위를 가지게 될 것이다. 고양이나 강아지를 만나면 대체로 귀엽게 느끼겠지만 뱀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어느날 또아리를 틀며 쉭쉭 다가오는 뱀의 꿀렁 거리는 모습이 나는 참 무서웠다. 어떤 사람에게는 뱀도 귀엽겠지만, 아마 고양이나 강아지에 비하면 선호도는 많이 떨어질 것이다.
애초에 우리의 세계에서 존재의 위치를 점하지 못한 동물들이 있다. 이들은 사실 실험실에서 태어나 실험실에서 죽는다. 어떤 실험쥐는 종종 A라는 유전자의 knockout mouse로 불릴 뿐이다. 이 표지가 그들의 정체성이 된다. 인간에게 주는 효용을 알기에, 이들은 희생된다. 이들의 의지 같은 건 사실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인간은 비정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람이 희생되는 것보단 낫기 때문이다. 이들을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이들을 데리고 실험한 연구자들 뿐이다. (그리고 불쌍한 대학원생들.)
어떤 한 녀석은 쥐를 여러마리 잡고 나면, 그날 악몽을 꾼다고 했다. 쥐들이 와서 자신을 잡아먹는 꿈이라고 했다. 동물에 영혼이 존재한다면, 꿈에라도 나타나야 마땅하다. 제작된 생명이라기에 거두어가는 것도 제작자 마음대로라면 참 서글프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숙명일 것이다.
유기가 넒은 의미의 '버려짐'이라면, 사실 모든 실험동물들은 제 쓸모를 다한 후 유기된다. 동물실험윤리위원회(IACUC) 가 존재하니 쓸데없는 고통을 동물에게 가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도, 실험 과정에서 어떠한 형태든 고통을 받게 되어있다. 오로지 인간만이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나는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수 많은 동물들을 떠올린다. 어떤 동물들은 나에게 구체적인 형상과 함께 나타나며, 또 어떤 동물들은 추상적인 이미지로 산개한다. 인간 중심적인 시선은 우리를 합리화하는 도구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를 정말로 (다른 종들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지구상의 괴물로 만들어버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유기는 사실 우리에게 참 멀다. 우리의 세계에 존재하지 못한 생명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애초에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분명히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에, 지식에, 사회에 녹아있다. 어느 존재까지를 반려동물로 받아들여야 할지, 생을 부여해야할지, 고민이 드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