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달동안 미국에 머무르게 될 것을 결정하게 된 계기는 순전히 나에게 잠 잘 곳을 제공해줄 친구의 집이 여기 있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였다. 사실 미국의 정치적인 이미지 때문에 미국 자체에 대해 별로 좋지 않는 시선도 있었다. 또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있던 나에게 미국이란 그저 문화도 유적도 역사도 빈곤한, 한마디로 별 기대하지 않았던 나라였다.
실제로 이 곳에 도착해서 보름 정도는 애초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삐딱한 시선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어딜 가나 너무 과할 정도로 많다는 생각이 드는 Security들. 친구는 그들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저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이 사회는 엄청난 불안이 잠재되어 있는 장소! 라고 밖에 생각이 들진 않았다. 또, 건축으로 유명하다는 시카고의 다운타운을 걸어다녀보아도, 기껏해야 여느 대도시와 다름없는 타워팰리스같은 삐까뻔쩍한 현대식 건축만 많은 빌딩숲에서 무엇을 느껴야하나..., 전철 역에서 맥도날드 모자와 코카콜라 티셔츠를 입은 어느 슈퍼뚱땡이를 보며 역시 정크푸드의 나라... 이것이 내가 미국과 시카고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보름이 지나자 나의 생각들은 점점 바뀌어 갔다. 그 변화의 시점은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문화예술적 잠재력과 수준을 어느정도 몸으로 체감한 순간부터였다. 그것은 정확히 음악 때문이었다. 길거리나 전철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스트리트 뮤지션들을 지속적으로 마주치며 그들의 진지한 표정과 자세들, 무엇보다도 수준급 실력에 매료되었다. 시내를 걸어가다가도 언제 어디서든지 그들은 충분히 내 넋을 빼앗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부러웠던 것은 그것이 특수한 장소에서 우연찮게 만날 수 있는 퍼포먼스 혹은 이벤트가 아니라 '시카고의 평균적 일상' 이었다는 점이다.
도처에서 목격되는 이 수준높은 음악의 '평균적 일상'은 그대로 도시의 공공문화시설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대도시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밀레니엄 파크'이다. 미술인들에게는 유명한 인도출신의 작가 애니쉬 카푸어의 거대한 콩 모양의 조형물이 설치된 곳으로, 이미 이 곳은 시카고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거대한 음료수 캔을 가위로 잘라붙여 디자인한 듯한 구조의 엄청난 크기의 야외공연장이 있다.
이 곳에서는 매일 저녁 무료공연이 열리는데 시카고 블루스 페스티벌, 롹 밴드, 재즈, 교회합창대회, 클래시컬 오케스트라, 일렉트로니카, 심지어 이런 공공장소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법한- 전혀 대중적이지 않고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익스페리멘탈 뮤직까지.. 공연의 스펙트럼도 다양했다. 공연이 없는 시간에 시카고 시민들은 공원 이곳저곳 잔디밭에서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마음대로 나뒹굴고 있었으며, 공연이 시작되는 시간에는 관객석과 그 넓은 잔디밭은 정말 꽉꽉 채워졌다. 매일같은 광경은 그 자체로도 무언가 감동적인 인상을 주었다.
이렇게 도시 한 가운데에 잔디 위에서 마음대로 나뒹굴수 있는 릴렉스하고 한가한 거대한 공공장소가 있다는 것, 저녁이면 가족과 와인한잔 가지고 와서 잔디밭에 앉아 와인을 기울이며 수준급 무료공연을 볼수 있다는 것은 서울과 비교해 보았을 때 충분히 부러워할 만한 점이었다. 다만 이 거대한 공공장소가 시민들로 하여금 정치적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성격인지는 아직 확인해보질 못했다. 만약 그것만 충족된다면 밀레니엄 파크는 시민들을 위한 도시의 가장 완벽한 장소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유럽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세 달동안 느낀 시카고에 대한 느낌은 대도시임에도 혼잡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고요하한 도시, 음악의 도시, 미술의 도시, 또 예술을 대하는 일반시민들의 평균수준이 높은 도시이며, 아티스트로서 혹은 정말 누구나 한번쯤은 살고 싶어할 만한 도시라는 점이다. 극찬을 했지만 편협한 단상에 불과하다는 점은 인정해야겠다. 좋은 것만 보고 느끼려는 여행자의 신분이 한계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thel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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