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책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유하게 하거나, 체험하게 하거나. 제 책은 후자에 속해요."(정유정)
작가의 변 처럼, [종의 기원] 역시 사유하기 보다는 체험하게 하는 책이다. 내가 정유정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유하게 하는 책이라 해도 사유하며 내 생각이 발전해 나가며 그 생각 속에서 내 의식이 즐겁다면 좋지만, 생각해야만 하는 책의 경우, 즉 생각하기를 강요하는 책들은, 쉽고 어렵고의 개념이 아니라, 안드로메다식 사변을 늘어놓으며 독자에게 모든걸 떠 넘기는데, 책읽기를 철저하게 '오락'으로 여기는 나로서는 그런 책들을 즐기기가 힘들다
문장 자체의 미학 보다는, 이야기의 미학을 중시한다는 작가는, 촘촘하게 이야기 구조를 만들고 그 구조 안에다가 인물이라는 '예쁜' 요소들을 심는다. 그리고 그들의 용모며 말투며, 행동 하나하나까지 디테일하게 창조해 낸다. 그가 악인이든 선인이든지 간에, 정유정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예쁘'기가 그지 없다. 제각기 스스로의 심장을 달고, 책장 한장 한장마다 팔딱팔딱 거리며 뛰고 있는 듯하다.
[종의 기원]은 그동안 정유정의 작품에 줄곧 등장해 왔던 나쁜놈들 중에, 우리가 살인을 최고 악이라고 볼 때, 최고로 '나쁜놈'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내 안에 있는 악을 끄집어 내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 악을 통해 발화되는 부차적 요소들을 통해서 그 악은 형상화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악'이라 표현될만큼 크나큰 죄악은 보통 사람들에겐 형상화 되어지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우리가 나고 자라며 알아온, 혹은 터득하기를 강요 당한 수많은 요소들의 지배를 받아오며 또다시 만들어지는 절제와 인내라는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보기로 했다고 한다. 너무 딱딱하면 스스로 너무 갇혀 버릴까봐 말도 예쁘게 하고, 행동도 예쁘게 하고, 용모도 예쁜 '유진'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그래서 더 무서웠던 녀석. 유진은 신경 의학적으로 분석할 때, 정신분열의 가장 최고 등급인 '프레데터(predator)'에 속하는 싸이코패스로 묘사된다. 이유없이-일반인인 우리에겐 없는 이유- 사람을 죽이고, 변태적인-역시 우리들에겐 그렇게 보이는- 성향으로 흥분하고 중독된다. 그리고 어머니와 이모, 해진. 이 세 인물을 통해, 우리 모두의 유진을 바라보는 시점들이 형성된다. 객관적일 수 없거나, 가족이라는 범위 안에서 철저히 권위적이거나, 가족과 친구의 경계에 서서 혼란 스럽거나... 그리고 사람들... 기대하거나, 의심하거나, 모색하거나, 겁내거나, 무관심하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