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에 가입한 날짜가 2월 26일, 첫 글인 가입 인사를 쓴 것이 3월 5일이니까 활동 기간이 만 2개월이 다 되어간다.
3월 17일에 쓴 동화는 어디로 갔는가 1를 이어나가 보기로 한다. 오늘 마침 @choim에 의해 @stylegold님의 오마주 프로젝트 글로 재발굴 되었기에 그 링크를 걸어둔다.
(오마주 글에 적용된 마크다운이나 소제목은 내가 원글에서 전혀 신경쓰지 못한 부분이다.)
당시에 나는
동화, 나아가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내용 그 자체보다는 그 여백에 있다는 주장을 펼쳤었다.
창작동화를 펴내면서 정해진 "교훈 포인트"를 몇 가지 정해놓은 소위 "철학 동화"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책에서 뭘 배워야 할지 알려주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다.
애초에 시리즈로 의도한 글이었기에, 다음 목표를 이렇게 세우면서 맺었었다.
소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전통적 동화가 왜 가장 뛰어난지, 왜 아직도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런 주제를 전개하기 이전에, 이 글에서는 어린 시절의 동화 읽기, 나아가 독서에 대해서 하나의 가설을 제시하고자 한다. 다분히 내 자신이 경험한 것, 그리고 그 경험한 것을 곱씹어보는 시간을 거쳐서 내놓는 가설이다.
가설:
어린이들은 교훈이 아니라 디테일을 좋아하고 또 기억한다.
(물론 디테일에 대한 그들의 호기심을 억누르고 그들의 독서를 교육의 일환으로 보는 환경에서는, 디테일에 대한 관심이나 기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가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가설 2:
상상력, 그리고 추가적인 지식 습득에의 욕구는 동화(독서) 내용의 결론적인 교훈이 아니라, 디테일에서 비롯된다.
아직 책을 읽지 못하거나, 읽을 줄은 알아도 즐기지 못하는 아이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책을 읽어준 적이 있는 사람은 공감할지 모르겠다.
중간중간, 내가 보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서조차, 아이로부터 질문이 계속 들어온다는 점.
사실 나는 어른에게 이야기를 별로 들어본 적이 없지만, 일찍 책을 접하면서 동생에게 이야기를 거의 매일 들려주면서 자랐다. 그래서 어린이의 질문 패턴에는 어느 정도 익숙하다.
이야기를 해준답시고 한 마디라도 할라치면, 'x가 뭐야?' 'y는 뭐야?'부터 시작해서, 지난 번 이야기와의 비교, 등장 인물의 성별이나 이름, 묘사 하나하나에 대한 오지랖을 시전하게 마련이다.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곧 답변이 나올 질문에 대해서는 곧 나오니까 잠깐 참고 조용히 들으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다소 억누르는 느낌은 들지만 좋은 대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이의 궁금증은 나중에 또 등장하거나, 스스로 답을 깨달아서 소진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단, 이런 방식("일단 들어봐")은 이야기로부터 무엇을 얻어갈지에 대해 정해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경우에만 유효하다. (예시: "그러니까 OO이도 말 잘 듣고 착하게 살아야 돼.")
그럴거라면 차라리 사소한 질문마다 일일이 답을 다 해주는 편이 낫다. 사소한 질문은 무시해버리고, "아이가 궁금해해야 마땅한 것"을 어른 스스로 정해버리고 답해주는 행동보다는 나은 것이다. 은연중에 그렇게 하고 있는 어른들이 분명히 있다.
위에서 말한 동화(독서) 내용의 디테일이란, 그런 사소한 질문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일컫는다. 물론 스스로 읽지 못해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단계에서의 이야기다.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스스로 책을 읽게 되는 단계로 가면, 아이의 눈이 머무는 디테일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는 문학 작품의 큰 테마보다는 디테일을 마음에 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릴 때는 그런 경향이 매우 두드러진다고 생각한다.
권선징악, 근면성실의 중요성, 세상의 잔혹함 또는 아름다움...이런 것들은 계속 살면서 절로 깨달아가게 될 것들인데다가, 실상 어떤 법칙도 아니다. 개인이 각자 결정하고 신념으로 삼아야 하는 문제들이다.
나는 아직도 스스로를, 동화의 많은 디테일들과 그것들로부터 뻗어나간 생각들, 상상들, 궁금해져서 추가로 뒤져본 지식들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인식한다.
이집트의 전래동화에서는 너무나 목말라서 당나귀의 땀을 훔쳐 마시면서 길을 가던 남자의 모습을 기억한다. 가보지도 않은 곳의 더위를 상상했다.
그 지역은 매우 덥지만 건조해서, 저녁에는 매우 서늘해진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의 책에서 신을 "반석" "그늘" 등으로 불렀다는 점으로 인해 알게 되었다.
같은 지역에서 신데렐라 이야기의 원형이 나왔는데, 그 이야기에서는 물고기가 어떤 초자연적 힘을 가진 동물로 여겨졌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물론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동물이 그런 의미를 부여받았다. 호피 인디언의 이야기, 인도의 이야기...
서구권에서는 나무가지를 심은 곳에서 요정을 나타나기도 했고, 새가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비슷한 지역에서 마녀는 나무로 만든 빗자루를 타고 다녔다.
아라비안 나이트에서는 색색가지 물고기가 나왔다. 그곳의 그들에게 물, 물에 사는 존재란 어떤 의미였을까.
개와 고양이를 낳아 쫓겨난 왕비도 있었다. 알을 낳은 여자의 이야기는 동양권에 있는데, 같은 포유류인 개와 고양이를 낳았다니...알은 계시와 신비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나, 개와 고양이는 그럴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왕과 결혼하기 위해 우유를 내다 버리던 할머니도 있었다. 세수를 한 물이 우유로 변했다는 거짓말을 하려고. 분칠을 하지 않고도 우유같이 하얀 피부라는 것이 대체 얼마나 선망의 대상이었길래...
(왕은 할머니의 정체를 알고는 내던져서 죽게 만들었는데, 할머니가 다시 미녀의 모습으로 살아나자 기쁘게 받아들였다. 할머니도 미련했고, 단지 공주가 예뻐서 반하는 왕과 왕자들은 양반이었다.)
여주인공에게 있어 나쁜 두 자매는 종종 따라붙는 옵션이었는데,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 류의 이야기 중 하나에 따르면, 여주인공은 호두껍질 속에서 아름다운 옷을 꺼내어서 무도회에 가기도 했다. 그냥 요술봉을 휘둘러서 옷을 만든 것보다 훨씬 믿기 어려운,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굉장히 와닿았다.
머리카락을 엄청 두껍고 길게 기르고 있는 여자는 머리로 사다리를 만들 수도 있을 정도였다. 머리카락으로 베를 짜듯이 해서 곳간을 황금으로 가득 채운 여자도 있었다.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요구를 받는 여자들도 있었고, 스스로 희생하듯 던지는 여자들도 있었다. 여자의 머리카락에 대한 생각들...
또 지중해와 맞닿은 아프리카 지역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었던 유대교와 기독교의 잔재들. 솔로몬이나 모세 같은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다.
거짓말로 인해 코가 길어지는 이야기는 피노키오 이전부터도 찾아볼 수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바로 코 밑에 있다'는 외국식 표현들을 보면, 거짓말이라는 것은 결국 뻔하다는 의미의 비유가 아니었을까.
찰흙, 불, 홍수에 얽힌 최초의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들의 공통점들, 뱀이 갖는 양면적인 특수성,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거인들이나 세 형제의 이야기들.
구하기 힘든 무엇을 가져와야 하는 미션들 속에 꼭 얽혀 있는 마술과 질투, 쉬운 죽음.
사실, 이야기의 전체 구조는 진부한 경우가 오히려 많았다. 인간사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의 디테일들로 인해, 모든 이야기는 의미를 부여 받곤 했다. 궁금해하고, 추가적으로 다른 것들을 알아보게 만들었고, 꿈을 꾸게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