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친구에게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날더러 천하에 둘도 없을 까다로운 놈이라며 혀를 차던 놈의 입에서 '아마도 네 이상형'란 말이 나온 건 아마도 취기, 또는 자기 자신이 품은 흑심이 헛소리가 되어 흘러나온 결과가 아닐까 했다. 그렇게 막연히 생각했었다. 게다가 애인도 있는 여자라니까...
그녀를 실제로 만나볼 기회는 뜬금없이, 갑자기 찾아왔다. 그녀의 생일 파티에는 지인의 지인도 자유롭게 갈 수 있다고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까지 다 불러서 즐기겠다는 것부터가, 그 여자는 내 타입이 아니라는 증거 같았다. 그 무슨 허세란 말인가. 아마 자기밖에 모르고 분위기에 약하며 순간적인 충동에 흔들리는, 그저 그런 흔한 반반한 여자겠지.
심심하던 차에 그럼 한번 구경이나 가볼까 하는 마음을 먹었다. 친구놈은 내가 가지 않겠다면 결국 아무나 끌고 갔을 것이었다.
마침내 도착했을 때는 눈길이 머무는 곳에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와 파티는 전혀 닮아 있지 않았다. 뭔가 공간과 시간을 화려한 사람들과 강박적인 비트로 가득 채우고, 정작 자신은 그 밖에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서글플 정도로 까만 눈동자에서 뭐라도 읽어내고 싶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친구가 나를 제법 잘 아는 것이었을까. 그전까지 그녀에 대해 들은 이야기들을 다 잊어버렸다. 그녀는 더 이상 내 친구와 아는 사이도, 애인이 있는 여자도 아니었다. 그저 나와 만나기 위해 그 자리에 나온 것 같았다.
그녀도 나를 의식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의식하기보다는 내가 그녀를 의식하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 같았지만, 그 둘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막막하던 것도 잠시, 그녀의 시선을 따르다 보니 다소 특이한 생일 케익에 시선이 꽂혔다.
케익 종류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이건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딸기 케익이었는데, 특이한 점은 딸기로 장식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크림이나 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딸기로 뒤덮인 모습이었다. 언뜻 보면 손질한 딸기를 한 판 가득 깔아놓은 모양새였다.
"케익이 좀...특이하네요." 나도 모르게, 영양가 없는 첫 마디가 튀어나왔다.
"...네." 말인지 웃음소리인지 모르는 대답이었다. 애교인지 비웃음인지 알 수 없는 묘한 구석도 있었다.
"이걸 잘라서 나누는 것보단, 한 입에 들어가는 작은 케익들이 나았겠네요."
"그러게요."
더 말이 이어지지 않을까봐 조바심이 났지만, 그녀는 굳이 내 앞을 떠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내 신원을 새삼 확인하기도 했다.
"OO씨 친구분이죠?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냥 하는 인사말이지만, 나에 대해 무슨 얘길 들었을까 그 순간만큼은 간절하게 궁금했다. 그러나 더 고민할 새도 없이, 그녀가 테이블 위의 커다란 상자로 손을 뻗었다. 유독 작은 손으로 짙은 네이비색의 벨벳 같은 천으로 감싼 상자를 열자, 빽빽하게 꽂힌 장미의 향이 코를 찔렀다. 아직 활짝 피지 못하고 봉오리를 이루고 있는 검붉은 장미였다.
"이거..." 상자 뚜껑을 손에 든 그녀는 여전히 웃으며, 살짝 든 턱으로 케익 방향을 가리키며 물었다. "똑같죠?"
그랬다. 어떤 여백미나 절제미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이 빽빽히 꽂힌 붉은 딸기와 검붉은 장미는 닮아 있었다.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곧 귓가에 흐르는 사람들의 말로 알 수 있었다. 둘 다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그녀의 남자친구가 준비한 것이었다. 무슨 해외 출장을 갔다고 했다. 준비성이 철저하네, 라는 남자들의 목소리와 부럽다는 듯한 인사치레를 하는 여자들의 말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가지 않는 와중에서도, 그녀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에 대해서는 귀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 딴지는 아니지만 꼭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닐텐데, 이런 모양은 넘치는 성의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를 뜻하는 것 아닌가?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람을 이러쿵 저러쿵 평가하자니 뭔가 치사한 것 같아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 같았지만, 생각이 그렇게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수두룩 빽빽한 장미와 딸기 사이에서 고개를 내미는 이파리 하나 없었고, 그 모양은 마치 그녀의 남자친구라는 작자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꽃다발로 만들기에는 너무 꽃이 많았다. 마치 두 팔로 안아들 수도 없을 만큼의 장미를 주겠다는 듯한, 자리에 있지도 않은 그 남자가 거슬렸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웃음기가 남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좀 이래요. 무조건 큰걸로, 무조건 많이."
"뭐...많으면 좋죠."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내 목소리에는 스스로도 의식할 만한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역시 속물적이고 세심함이라곤 없는 그런 남자일 거야. 돈을 벌 욕심에 애인의 생일에도 불참해야 하는, 그리고 그 죄책감을 빽빽히 꽂힌 장미와 딸기 속으로 꾹꾹 눌러 담아야 하는 그런 인간.
"이거 만들려면 잎을 다 정리해야 하는 거네요."
"...그러게요." 그녀의 말은 다소 시큰둥했지만, 그 타겟은 내가 아니었다. 그녀도 나처럼, 이렇게 숫자로 승부하는 남자가 내심 못마땅한 것이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든 의기양양한 감정을 눌러 감추며, 한 마디 더 무리해서 던졌다. "남자친구 분이 못 와서...섭섭하시겠어요."
"네, 뭐..." 마치 본인의 애인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의식했다는 듯이 무표정한 그녀였지만, 그 순간 깨달았다. 이렇게 큰 장소를 빌려서, 아는 사람들의 지인까지 초대한 이유를. 그녀는 상습적으로 외롭게 남겨져 있었고, 그걸 즐기는 듯 했지만 가끔은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연민이라기엔 다소 헛헛하고 따땃한 감정이 치밀어 올라 눈을 내리깔아야 했다. 내 생각을 그녀가 눈치챈다 해도 이미 상관은 없었지만, 왠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면 싫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흘끗 친구놈을 보니 디제이와 이야기를 나눈다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살짝 추워지는 가을이었지만, 그녀는 웃옷을 집어들고 테라스로 향했다. 따라갈 구실을 댈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나는 통유리로 된 문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따라 나갔다. 제법 여자를 많이 만나본 티를 굳이 감출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사실 그 어떤 것도 감추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순간순간 자신을 잘 읽어주고 응답해주는 사람일 테니까.
아마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나와 그녀가 꼭 연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가을밤의 선선한 바람 때문이었는지, 바쁘고 센스도 없는 남자 친구가 그다지 큰 장애물로 여겨지지 않아서였는지. 그도 아니면, 말을 할때마다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보는 눈동자에서 뭔가 보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쌀쌀한 야외 테라스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들을 무수히 많이 했다. 아무 것도 아니지만 쌓이면 모든 것이 되는 그런 이야기들. 다른 사람이 간혹 나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으나, 그럴 때마다 나는 말을 아끼거나 담배를 태운다는 이유로 멀찍이 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해서 최대한 그녀와 둘만 있을 시간을 늘렸다. 내 그런 의도를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었다. 다른 사람이 다가오면 그녀는 자연스레 내게 등을 돌리고, 멀어질 틈을 주었다.
물론 잔뜩 취한 듯한 내 친구가 나왔을 땐 그러지 못했다. 그놈이 혹시라도 괜한 소리를 해서 일을 망칠까봐 긴장이 되기도 했다. 역시나 친구는 그녀에게 큰 소리로 나에 대한 자랑들을 떠벌리며, 그녀의 친한 친구 중에서 좋은 여자를 내게 소개시켜 주라고 권했다.
쥐어박을지, 취기를 달랜다는 명목으로 끌고 들어갈지 고민하려던 순간, 어색해진 공기를 가르며 그녀의 대답이 선뜻 울려왔다. "아, 진짜 해줄게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 번호를 물으며, 내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번호가 내 폰의 화면에 뜨는 순간, 이 장소를 떠나야 진전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녀와 연결될 방법은 얻었고, 점점 많은 이들이 테라스로 쏟아져 나와, 파티의 주인공인 그녀에게 쓸데없는 말을 걸고 있었다.
사람들에 떠밀리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녀는 이전에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싱긋 웃어 보였다. 번호를 주고 받은 진짜 이유에 대해 암시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어차피 조만간 다시 보게 될 테니까, 하는 마음으로 눈을 맞추며 목례를 했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지만, 차는 다음 날 찾기로 하고 멀지 않은 집까지 걷기로 했다. 뭔가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만 같았고, 일단 차가운 밤 공기 속에서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한 시간이 지나서야, 친구놈 생각이 났다. 잘 알아서 집에 갔겠지만, 핑계 삼아 그녀에게 문자를 남겨두기로 했다.
그때 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취기가 다 풀린 친구놈이 찾아와, 대뜸 락 번호를 누르고는 거실 러그에 드러눕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있었냐?" 고요를 방해받아서 순간 짜증이 났지만, 뭔가 그녀에게서 뜻 있는 말이라도 전해주진 않을까 내심 기대가 되었다.
"어, 파하고 사람들 가는 것도 보고...뭐 대충 뒷처리도 보고 왔지."
"어차피 빌린 곳인데 무슨 뒷처리할 게 있어."
누워있던 친구가 고개를 들었다. "없기는...그래서 너가 안 된다는 거야."
무슨 뜻이지, 하는 생각에 약간 뜨끔했다. 친구는 하품 하더니, 툭 내뱉으며 다시 누웠다. "걔가 자기 친구 소개해준댔잖아. 그거나 잘 해봐."
역시 이 둔한 놈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내게 누구를 소개시켜줄 마음 따위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을. 그 다음날 아침, 한 번호를 첨부한 메시지가 그녀에게서 와 있기 전까지, 나는 그녀의 마음이 나와 같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침 나와 잘 맞을 것 같은 친구가 있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차마 답장을 할 수 없었고, 그녀가 무슨 이유로 인해 솔직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깊어갈 때쯤 문자를 보냈다. 이번에는 그녀가 답하지 않았다. 그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에도.
그 후로 한동안은 여러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그저 그날 밤의 스쳐 지나가는 분위기에 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한 탓일까. 아니 애당초 그런 분위기가 있었던 게 맞는 것일까. 또 그 날 찾아온 친구는 어디까지 눈치 챘을까. 그녀가 빽빽이 꽂힌 장미와 딸기를 보던 눈길에, 사실은 남자친구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 것일까.
어떤 날에는 그녀가 나를 갖고 놀았다는 결론을 내렸고, 또 어떤 날에는 내가 지독한 착각에 빠져 현실을 왜곡시켰다고 인정하곤 했다. 무엇을 언제, 어디서부터 오독한 것인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깨알 같은 문학 연재가 또 지연되었는데, 갑자기 떠오른 이야기가 있어 오랜만에 써본 단편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