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집 2화: 안개 (1)

하필이면 날씨까지 음침했다. C 신부는 걸음 아래 고인 도랑을 조심스레 피하며 걸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줄만 알았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군, C 신부는 속으로 되뇌었다.

P 부인의 저택에 두 번째로 찾아가는 길이었다. 첫 번째 방문에서 그녀는 눈이 빨개진 상태로 나와서는 거의 울기만 했다. 신자들의 우는 모습에 익숙해진 C 신부였지만 P 부인의 눈물만큼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딸의 죽음이라는 실체가 확실한 비극이 있었다. 그런 류의 비극에는 익숙한 C 신부였다. 이번에는 P 부인에게 진정한 위로를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P 부인은 환갑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두가 인정하는 미인이었다. 사심 없이 아름다움을 관찰하기를 좋아하는 C 신부는 성당에서 P 부인을 처음 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핑크빛 뺨이 갖는 사랑스러움이 사라지고 만 뒤에도, P 부인처럼 수려한 생김새에는 또 다른 우아함이 깃들기 마련이었다. 오늘처럼 가끔씩 엉뚱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점만 아니었다면, 미사에 참석해서 조용히 앉아 있는 P 부인을 보는 일은 C 신부와 같은 심미안을 가진 인물에게 있어 꽤나 즐거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P 부인은 그 도시에 정착한 중년의 남작에게 일찍이 시집을 갔었는데, 아마도 별 사랑의 감정은 없었을 것이라고 C 신부는 생각했다. 아마도 남편은 그녀를 사랑한다기보다는 숭배했을 것이고, P 부인은 그것을 조용히 용인했을 것이었다.

남작은 고작 3년 만에 P 부인과 어린 딸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기고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따라서 비교적 최근에 이 도시로 부임해온 C 신부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은 P 부인의 두번째 남편인 P 씨였다.

renoir_pierre_auguste_3.jpg

P 부인은 중년에 접어들면서 P 씨와 재혼했는데, 이 P씨라는 남자가 그녀의 딸 D양과 비슷한 연령대로 추정된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의 출신지가 어디인지, 어디서 뭘 하던 사람인지에 관해서도 제대로 알려진 바는 없었다.

아마도, 최근의 불행한 사건이 아니었다면 P 씨와 P 부인, 딸 D양은 꽤 오랫동안 그렇게 조용히 살아갔을 터였다. 만약에 변화가 있었다면 D 양이 어디론가 시집을 가버리는 정도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D 양은 벌써 마흔에 접어드는 나이까지도 집을 떠날 의사를 비치지 않고 있었다.

D 양은 어머니인 P 부인의 빼어난 용모를 물려받지 않았음은 물론 성격도, 풍기는 분위기도 지극히 평범했다. 단, 최근 일 년만큼은 그 수수한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미모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눈길을 잠깐이나마 끄는 그것은 아마도, 뒤늦게 찾아와서 평범한 얼굴 위에서나마 절정에 다다른 젊음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침에 잠깐 활짝 피는 소박한 꽃과도 같았다.

C 신부 외에는 D 양의 변화를 알아차린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없을 것이었다. D 양이 불과 몇 주 전,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D양이 강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도 있었고, 다른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탔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름대로의 설득력이 있었다. D 양 행동의 동기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모두를 당황케 한 것은 D 양의 의붓아버지인 P 씨 역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아무런 언질도 없이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

P 부인은 가끔 나오던 미사에도 발을 끊었다. 그녀의 저택은 평소보다 더 무겁고 잠잠했다.

D 양이 죽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데다가 P 씨도 사라졌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모두들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P 씨는 너무 젊었다.

한 가지 의문점은 D 양이 스스로 죽은 것처럼 행세하는 이상 재산을 손에 넣을 수가 없을텐데, P 씨가 그것을 감수할 정도로 D 양을 사랑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이미 마흔이 된 D양, 그리고 갓 스무 살 시절부터 약 이십년간이나 P 부인의 남편으로 살아온 P 씨 사이에 얼마나 대단한 로맨스가 생겨났을까.

이 점에 대해 C 신부는 본디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그 한계를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건 D 양의 얼굴에는 그간 보지 못했던 빛이 감돌았었고, 그것이 사랑의 결과였다고 보는 것은 나름대로 그럴싸했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C 신부는 D 양의 유서가 발견되고 수색대가 온 지역을 누비며 D 양을 찾는데 실패하고 나서야 P 부인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안타깝지만 D 양과 P씨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P 부인의 문제는 시간만이 치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셈인데, 대체 어디서부터 위로의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P 부인은 신부의 복잡한 심경이 무색해질 정도로 딸만을 걱정했다. 보모들의 손을 빌려 D양을 키워냈을 것이 분명한 P 부인도, 역시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그녀는 신부가 방문한 시간 내내 딸의 생사를 모른다는 사실에 흐느꼈다.

그럴 리가 없다, P 부인이 내내 읊조린 말이었다. 그녀는 D 양이 자신을 배신하고 P 씨와 도망을 갔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완강히 부인했다. 남편은 곧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P 부인이 울다가 지칠까봐, C 신부는 조용히 가정부에게 눈짓을 하고는 저택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는 P 씨는 물론 D 양에게까지도 미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러다 간밤에 D양이 드디어 발견된 것이다. 정확히는 그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신부는 순간 P 씨를 떠올렸으나, D 양의 죽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자살인 것으로 알려졌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곱게 자라서 늦은 나이에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어설픈 거짓말인 줄만 알았던 유서 내용이 진심이었던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P 씨의 행방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신부는 걸음을 재촉해서 P 부인의 저택에 도달했다.

(2화에서 계속)

H2
H3
H4
Upload from PC
Video gallery
3 columns
2 columns
1 column
44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