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시 아닌 시를 선물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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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지 못하겠거든 소설을, 소설을 쓰지 못하겠거든 평론가를 하라는 말이 있다. 주로 평론가 입장에서 자조적으로 할 만한 말이긴 한데, 나는 꽤 어릴 때부터 이 말을 달고 살았다. 분석하기를 좋아하는 마음, 그리고 감성적인 글의 가치는 알지만 차마 직접 쓰지는 못하는 성격이 빚어낸 결과였다고나.

그러다가 언젠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한 은사님, 내 지도 교수님께 직접 만든 액자를 선물했다. 스승의 날에 학생들이 드리는 선물을 전부 돌려보내시던 분이었지만, 연구실을 찾으면 책장에 어김없이 내가 드린 액자가 올려져 있었다.

액자라고는 하지만, 물론 사진을 넣어드린 것은 아니다. 그건 좀...

내가 좋아하는 글귀를 넣어서 드렸다. 시에 대한 것이지만 시는 아닌, 시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시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 문학을 하고는 싶지만 눈만 높아져서 직접 하지는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울릴만한 글이었다.

시인 릴케의 말테의 수기...나는 그 책을 영문으로 읽었는데, "시를 쓰려면"이라는 제목으로 묶을 수도 있는 부분이 가장 와닿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원문도 참고해서 옮겨서, 액자에 넣었다.

릴케는 그 글에서, 시를 쓰려면 필요한 조건들을 나열한다. 펜을 쉽게 들 생각을 접게 만드는 내용이다.

그러나 시를 쓰려면 필요한 삶의 조건들을 더 열심히 채우라는 뜻으로 다가오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 열심히 쓰라는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내 마음에 드는 글이기도 했지만 우리 교수님도 나처럼 문학을 좋아하시지만서도, 아니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감히 직접 쓰려는 생각을 못 하시는 것 같아 그 글을 골랐다.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그 글을 읽으실 것 같았다.

릴케의 그 글이 담긴 액자는,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시는 우리 교수님께 내가 드린 유일한 선물이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젊은 시절에 쓰는 시는 별로 의미가 없다.
평생, 가급적 기나긴 생을 보내며, 달콤함 그리고 빛을 모은다면 아마도, 인생의 끝자락에서 괜찮은 열 줄의 시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시라는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듯 감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은 일찍이 생겨날 수도 있다.)
시는 경험이다.
시 한 줄을 쓰기 위해, 시인은 많은 도시들, 사람들, 사물들을 보아야 한다.
그는 동물에 대해 배우고, 공중에 나는 새를, 아침에 피는 자그마한 꽃들의 움직임을 느껴야만 한다.
알지 못하는 곳의 길들을, 예기치 못한 만남들을, 오랫동안 예견해온 이별들을 회자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도 이해가지 않는 유년 시절의 나날들, 기쁨을 받고서도 (다른 누군가를 위한 기쁨으로 여겨졌기에)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슬픔을 끼쳐드릴 수밖에 없었던 부모를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몇 가지 심오하고 중대한 변화와 함께 시작된 어린 나날의 질병들, 홀로 갇힌 조용한 방에서 보낸 나날들, 바닷가에서의 아침, 바다 그 자체, 여러 바다들, 급하게 떠나서 모든 별들과 함께 날던 여행의 밤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나같이 다른, 수많은 사랑의 밤에 대한 기억, 해산의 고통을 겪는 여인의 비명과 가볍고 새하얗게 잠을 자며 다시 회복되어 가는 여인에 대한 추억이 있어야 한다.
죽어가는 이의 곁을 지켜도 보고, 열린 창으로 소음이 들어오는 방에서 죽은 이의 옆을 지켜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추억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추억이 많이 쌓였을 때, 잊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 추억들이 되살아나기까지 기다릴 크나큰 인내심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추억 자체가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추억이 우리 속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어, 그 이름도 상실하고 더 이상 우리 자신과 분리될 수 없이 될 때야 비로소 찾아오는 어느 드문 순간에, 시 한 구절의 첫마디가 그 한가운데에서 일어나, 나아오게 되는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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