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opos의 의미: ~에 대하여, (특정한 상황에) 맞는. 적절한.
apropos 시리즈의 서문
어떤 개념이나 현상의 정의를 위한 단상이라는 것을 글로 표현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일찍이 밝힌 바 있다. 그 어떤 계기도 없이 흔한 주제들에 대해 풀어놓는 일은 쉐도우 복싱, 또는 말 그대로 안물안궁 식의 글쓰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태어나자마자 형성되기 시작한 생각들을 굳이 쓸 필요를 느끼는 경우는 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우선은 감각적으로 즐겁게 느끼게 해주는 것들, 또는 일상에서 의식의 흐름에 따라 떠오르는 상념들에 대해 쓰는 편이고, 앞으로는 아주 살짝 학술적인 것도 기록할 예정이다. 반면, 평소에 당연시하고 있는 개념들을 굳이 설명하거나, 무엇을 새로이 깨달았다는 듯 굴거나, 불특정 다수를 설득하기라도 하려는 듯한 글쓰기를 할 이유는 별로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런저런 주제들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들은 이미 매우 어릴 때부터 많은 과정을 거쳐온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더 이상 생각의 형태를 띄고 있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이미 내 일부나 마찬가지인 "개념들"이다.
어찌 되었건 내 일부인데, 너무나 천대 당연시해온 것 같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굳이 말로 풀지 않아도 속에 자리잡고 있는 개념들을 가끔씩은 블록체인에 박제해놓기로 한다.
이는 곧 1화를 쓰게 될 "성전청소 시리즈(서문 참조)"와도 맞닿아 있는 작업이다. 작은 개념들이 모여서 내가 현상/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apropos 시리즈는 번호를 붙인 간단한 문장들로 기록하기로 한다.
첫 주제는 자존감인데, 이 글에서는 자존감을 다루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하는 개념으로 자존심과 자부심을 꼽아보았다.
자존감은 많은 이들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느끼는 부분이라, 두리뭉실하게 묘사되는 일이 잦다. 읽는 이의 입장에서 내가 갖고 있는 자존심과 자부심의 개념을 모른다면, 내가 정의하는 자존감을 실제보다도 더 두리뭉실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사실 하나의 개념을 정리할수록 남은 둘은 매우 쉬워진다는 점도 있다.).
apropos #1. 자존심, 자부심, 자존감
자존심
자존심 일반의 문제
일단, 자존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 밟아야지만 꿈틀하는 지렁이라도 말이다.
자존심은 인간의 기본적인 자기 보호를 위한 도구이다. 개인에 따라 미미할 수는 있어도, 아예 없을 수는 없다. 따라서 자존심이란 특별한 것도, 특정한 류의 이들의 특징도 아니다.
자존심이 부각되는 경우
막상 자존심이라는 용어는 '고집'이나 '완고함'의 의미로 쓰일 때가 더 많다. 자존심이라는 것은 모든 이에게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상에서 자존심이 부각되는 경우는 "필요 이상으로" 드러나는 경우이거나, 최소한 그렇게 보이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자존심만 살아가지고"라든가 "자신도 잘못한 줄은 아는데 자존심 때문에 화해를 못한다"거나 하는 표현이 흔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자존심은 사실상 "고집"이나 "완고함", "변화나 소통, 공감을 거부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비록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자존심이 특히 강한 사람은 잘못을 인정하거나 먼저 사과하는 등의 타협적인 양보를 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어려워하는 과정에서 자존심이 부각되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자존심의 최대 약점이 보인다. 분명히 스스로에게 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 일조차도 자존심이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존심의 재정립
앞에서 자존심은 누구에게나 있고, 따라서 어지간히 특별한 '고집'의 형태가 아니라면 굳이 부각될 일이 없다고 정리하였다.
그렇다면 자존심의 순기능은 무엇일까. 정확히 말해서, 자존심의 긍정적인 활용법 또는 긍정적인 진화(?) 상태는 무엇일까.
자존심 그 자체로는 미덕도 악덕도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단지, 6번에서 서술했듯 가능한 행동을 제약함으로서 결과적으로 해를 끼칠 수는 있다.
앞서 말한 '고집'으로 부각되는 자존심을 바꿔야 한다. 그때그때 처한 상황이나 남들에 대해 세우는 자존심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존심은 고작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사람들에게 날을 세우는 태도 따위가 아니다. 누구에게 밟혔을 때에나 반박하는 불쌍한 태도 또한 아니다. 상황과 상관 없이 원래부터 자신의 깊은 속에 있는 방어 기제이다. 분명히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작동하게 할 수 있다.
물론 자존심을 무엇으로 재정립하면 좋을지에 대한 정해진 답은 없다. 참고로 나는 자존심을 이렇게 재정의했다. 자존심은 그때그때 꺼내 쓰는 것도, 당장 이 순간에 필요해서 꺼내 쓰는 것도 아니다. 자존심이란 "인생 전반에 걸쳐서 중시하고 따를 수 있는 기준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자존심을 지엽적인 상황들로부터 꺼내어서, 평소에 지키고자 하는 신조에다가 부록처럼 박아넣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면 자존심은 양심까지도 훌륭하게 대체할 수 있다. 나는 철저한 성악설 신봉자로, 경우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인간의 양심 따위에는 큰 신뢰를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자존심이 곧 양심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범법 행위나 비겁한 행위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기 때문에 안 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그나마 가장 신뢰 가능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자부심
자부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편의상 가벼운 자부심이라고 부르는 종류는 쉽게 얻은 것, 특히 선천적인 것에 대한 자부심이다. 그래서 가벼운 자부심이란 누구나 본능적으로 갖기도 하고, 남들에게서 발견했을 때 가장 쉽게 알아보는 것이기도 하다. 신체, 능력, 선대가 일군 부와 그에 따른 집안 분위기 및 인맥 등에 대한 자부심을 말한다. 이를 가볍다고 칭하는 이유는 이것이 별다른 뒷받침 없이는 무너질 수도 있는 류의 자부심이기 때문이다.
편의상 무거운 자부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앞서 자존심의 재정립을 논했으니) 정의하기 쉽다. 재정립된 자존심에 따라 행동한 만큼, 살아온 세월만큼 커진 자부심이다.
가령 양심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자존심의 기준에 따라, 남부끄럽지 않게 정직한 사업을 해왔다고 한다면, 무너뜨리기 힘든 무거운 자부심이 자연스레 생기게 된다.
가벼운 자부심이 '축복'에 의한 것이긴 하나, 사실상 무거운 자부심만이 긍지라고 불릴만하다.
자존감
자존감- 비교
자존감이 중요하다는 말은 이제 매우 흔하다. 강조하기 위해 강의를 하는 강사들도 있을 정도이다. 그들이 자존감이 정말 튼튼(?)한지, 혹은 그렇게 키워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왜냐하면 어릴적부터 자존감을 키우기 좋은 환경이란 생각보다 매우 조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의 말을 듣고 있자면, 자존감이란 일정 기간 동안에도 몇 번이나 높아졌다가도 낮아지기도 하는 그런 것처럼 여겨진다. 나는 그런 것은 오히려 위에서 거론한 가벼운 자부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외모, 성적, 성과, 평판, 남들의 대우에 의해 높낮이가 바뀌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존감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그런 경우라면, 자존감이 미미하거나 거의 없다고 보인다.
자존감이란 '내가 나이기 때문에' 아끼는 것을 말한다. 굳이 남들 위에 내세우려고 한다거나 하는 목표와는 상관 없다(그런 것은 경우에 따라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겠지만....)
자존감은 내가 지나온 모든 날들, 거기에서 쌓은 경험과 얻은 지식과 느낀 감정들의 합 때문에 나를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좋아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을텐데,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는 잣대 중 하나는 나를 남과 바꾸고 싶어하는지의 여부, 즉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지의 여부와 그 빈도일 수 있겠다.
또 다른 잣대는 스스로 남과 비교하는지의 여부, 정도, 빈도가 될 수 있겠다.
물론 남이 되고 싶어하거나 비교를 자주 할 수록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면 남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비교를 해서 스스로를 높이 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비교 자체를 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6번과도 같다.
간혹, 6번과 같은 이유가 아니라 뭔가 외부적인 요인으로 스스로에게 만족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풍족한 환경이라든가 예쁜 자녀, 직장에서의 성과 등...('가벼운 자부심' 참조)그러나 결국 6번이 아닌 그런 요인들로 자존감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보호막을 입을 수는 있어도.
우리는 높은 자존감보다는 그 결핍이나 부족이 더 자주 드러나는 것을 보는데, 어느 정도의 환경적인 압박이 있을 때 드러난다. 물론 압박이라 해봤자 일상적으로 항상 보는 상황들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행복해보이는" 또는 "뛰어나 보이는" 따라서 자신과 비교하게 되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경우이다.
자존감- 상처
가령 우리는 남들의 '겸손' 부족에 집착하거나 지적하는 '선비질'을 가끔 목격하게 된다. (사실 겸손은 이 시리즈의 다른 글에서 따로 다루어야 할 주제이다.)
실제로 남들의 겸손이 부족한지 아닌지는 그때마다 다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자존감이 부족할 수록 그런 이유로 인해 자주, 쉽게 불편해 한다는 사실이다. (부록: 의견이 확실한 사람을 보면, 자신이 강요를 받고 있다고 느낀다. 실제 강요가 없을 때조차...)
유효한 반박을 하지 못하면서 남의 태도를 물고 늘어지거나, 폄하하는 행위는 보통 '트집'으로 해석된다. (예시: 잘난 것 같지만 너무 잘난 척 한다. 잘하지만 너무 자만하는 것 같다. 너무 당당한 걸 보면, 뭔가 약점이 있을 거야, 등등.)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모짜르트를 음악적으로 비판할 수 없다면, 오만한(?) 태도를 이유로 들며 깎아내리려 들수록 스스로 초라해질 뿐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항상 많다. 그들 대부분에게 객관적인 판관의 자격이 있을까, 아니면 배아픈 것을 잘 감추는 것일 뿐일까.
그렇게 하는 이유로는 질투심을 거론하기 전에, 트집 잡는 이의 자존감이 상처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실제로, 일명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자신의 자존심이 상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기분이 나쁘다거나 마음에 안 든다거나 아니꼽다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자만할지언정 자신의 자존심이 대체 왜 상하는지 진심으로 의아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른 후 깨달았다. 그는 언어적 표현에 미숙했고 따라서 보통 이상으로 솔직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상처를 받은 부분은 자존심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감이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런 자존감에 대한 상처를, 다른 표현으로 포장하는데 능숙하다. 아니꼽다는 표현도 옹졸하고 질투심 많아 보이기 때문에 기피하고, 진정한 걱정으로 표현하거나 자신을 모든 것을 초월한 성인군자쯤으로 승격시켜놓고 남의 태도를 지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만약에 특히 자신감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당신의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면, 그것은 당신의 자존감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다른 표현으로는 자존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존감- 작은 결론:
앞서 내가 정의하는대로의 자존심, 자부심이 있다면 자존감에 매우 유리하다. 자존감에 대한 내 개념들을 이 정도로 다 정리했다고는 확신할 수 없으나, 애초의 목표인 최소한의 기록은 이 정도로 해둔다.
자존감이란 언젠가 한번 개인적으로 정의내리고 싶었던 개념이다. 그것에 대해 한 마디 할 정도의 고민과 경험은 있다고 생각해서인데, 그 고민과 경험은 다음 기회에 적절한 형태의 글로 풀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