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pen 공모전] 나 혼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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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깨끗한 곳으로 이사를 왔지만, 끓여 마신다. 공기가 나쁠 땐 창을 열지 않아도 되도록 생수를 잔뜩 주문한다. 또 요거트 만들 우유, 고양이 모래와 사료, 고기, 야채, 치즈, 피칸을 인터넷으로 주문한다. 기록하기 뭐한 것들을 제외하면 이 정도가 내 생필품이다.

공기 좋은 날은 계란을 사러 40분쯤 걸어서 백화점에 딸린 대형 마트에 간다. 나름 먼 곳이기 때문에, 아무리 장보러 가는 거라지만 예쁜 운동화를 신고 간다. 옷이나 신발은 매장서 걸쳐보고, 역시 인터넷으로 산다.

쇼핑을 하는 대신, 피부나 머리 손질을 위해 가는 곳은 없다. 고양이들 때문에 손톱에 뭘 바를 일도 없고, 화장도 안 한다. 검소해서라기보다는 끈적거리는 제품, 그리고 남의 손이 머리나 얼굴에 닿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가끔 같은 여자가 친근감의 표시로 팔짱을 껴도 기절초풍한다. 티가 날는지는 모르겠다. 요즘은 새 친구를 굳이 만들려들지 않으니까.

원래는 서너 명쯤 초대해서 요리를 해 먹이는 것을 좋아했었다. 나는 누구에게서나 재미있는 면을 잘 찾아낸다. 타인은 내 간접 경험이니까. 그런데 요즘은 쉽게 거리를 좁혀주고 싶지 않다. 아주 가까운 사이는 원래도 싫어했고, 아예 멀리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적당한 거리를 기꺼이 유지하려는 사람은 잘 없다. 혼자 빠져들고 혼자 미워하는 사람이 더 많은지도.

혼자 살기엔 넓은 내 집엔, 비록 오래 전이지만 나름 고급 주택으로 지어진 느낌이 아직 남아있고, 거실 창은 지금 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풍경을 담고 있다. 집에서 편하게 일하는 나는 그저, 이곳에서 살고 싶어서 서울에서 온 사람이다.

고양이가 아홉 마리나 되지만, 집 안에 갈 곳이 많다보니 한꺼번에 다 보긴 힘들다. 고양이는 원래 애교가 많은 게 아니라 애정이 많다. 요는, 좋아하는 전쟁영화라도 보면서 눈물을 빼지 않으면 나는 울 일이 없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팔자가 늘어진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나는 항상 ‘더 베풀어도 되는 사람’이 되어 있다. 그게 별로 유쾌하진 않으니, 혼자를 선택하는 날이 많아졌다.

인터넷 쇼핑을 좋아한다곤 했지만, 얼마 전부터는 최소한의 생필품만 산다. 내심 기다리던 택배가 오면 반가워서 기사 아저씨에게 현관 폰으로 인사를 열심히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바빠서 집에 없는 척 하면, 안 가고 서 있는 것을 자주 본다. 길고양이를 보고 들어오는 어두컴컴한 길에 차를 대놓고 있다가 불쑥 인사를 하는 일도 있었고, 한 번은 친척이 와서 현관 폰을 받았는데 그 후에 누가 같이 사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악의는 없었겠지만, 혼자 살다보면 순간 간이 작아질 때가 있다.

그래도, 여기 온 후로 혼밥, 혼차, 혼술이 너무 즐겁다. 물론 혼자 사냐고 놀란 투로 묻는 사람도 있기는 했다. 다 큰 자식이 있는 아주머니였는데, 파고들 것 같아서 미리 철벽을 쳤다. 그 다음에 마주쳐서 예쁘다고 칭찬해주실 때를 기다렸다가, 무신경한 표정으로 “아, 네”로 응수했다. 이젠 말을 쉽게 안 건다.

사실 맘에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고, 원래 좀 감흥이 없다. 내 얼굴은 아빠 얼굴이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시간을 들여 얻은 것은 남들이 종종 고상하다고 하는 내 “취향” 뿐이다. 집도 물론 아버지 소유다.

어디 싸우러 나가서 영웅이 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문학적 소질이 있어서 예술가 행세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학점이 목적인 학생들 가르치기도 싫어서, 취업하려는 시도 역시 하지 않았다. 읽는 책과 보는 영화, 듣는 음악을 제외하면, 내 삶은 저탄수화물 식단과 자가 모공 관리, 자유롭다는 만족감, 그뿐일지도 모른다. 제 아무리 깊은 영혼일지라도 얕은 생활에 젖어 살게 마련이다. 종종 하는 표현인데, 이것 역시 인간의 condition(조건이자 상태)이다.

간밤에는 익숙한 류의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어쩌면 이틀 전 밤이었을 수도 있겠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결혼을 앞두었지만 밝히고 싶지는 않은, 그렇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던 친구의 전화'. 용건도 없는 듯 하면서 끊지도 않는 이런 전화는 주로 자유를 잃기 직전의 누군가가 거는 것이다.

예전에 너무 친한 친구가 이랬을 때, 뭔가 아까워서 그런 망상도 해봤다. 영화 ‘졸업’처럼, 손을 잡고 도망가자고 말하는 거다.

그러나 도망가는 것까지만 재미있을 것이다. 내가 또 그렇게 가벼운 사람이다. 그래서 그냥 장난기를 누르고 날짜는 잡았냐고 대뜸 물어본다. 당황해하는 데서 재미를 찾는다. 진짜로 깔깔 웃는다.

누군가가 자유를 잃기 전에 생각나는 게 나라는 느낌은 그리 나쁘지 않다. 뭔가 비겁한 것 같지만 나는 적당하거나 먼 거리에서 봐서 무조건 반짝거릴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로 남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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