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집 1화 : 무제

요즘 들어 찾을 일도 별로 없는 녹색 창을 열어, 적당한 키워드를 검색한다. 또 이름 바꾸고 어딘가에 숨어들어가 있겠지. 역시나, 딱 느낌이 오는 이름이 있다.

혹시나 해서 최신 글을 몇 개 클릭해본다. 그럼 그렇지, 하나도 열람이 되지 않는다. 그제서야 가입하기를 누르고, 다소 귀찮은 가입 질문에 답을 한다.

벌써 38번째 가입이다. 매번 다른 닉네임을 정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그 바람에 최근에는 방치해둔 트위터 계정으로 메시지가 날아들기도 했다.

"우선 연락만 하고 지낼 수 없을까요? 저는 서울 사는 자영업..." - 이런 글은 패스.

"혹시 OO에 글 남기신 분 맞나요? 아니라면 실례했습니다. 혹시 본인이시면, 인간 심리와 관계를 깊이 있게 아시는 분 같아서..." - 이런 글은 읽어는 주지만 결론은 패스다.

별달리 기대하는 말도 없는데 왜 이럴 여지를 열어두는지, 나도 나를 모르겠다. 어쨌든 힌트는 내가 뿌려두었고, 그걸 알아보는 몇몇이 있었을 뿐.

어차피 하루짜리겠지만, 새로운 듯 아닌 듯 한 닉네임을 넣는다. 이번에는 새로운 아이를 발견할 수 있기를.

첫 글을 작성한다. 역시나 가입인사 게시판 빼고는 접근도 안 되게 해두었다.

정직하게 글머리를 선택하는 이상, 조회 수는 단숨에 올라가게 되어 있다. 일명 희귀 성별, 희귀 성향이란다. 조금은 우습다.

가입인사를 빙자한 낚시 글을 올린다. 사실상 거의 복붙이다. 이제 탈퇴해도 상관이 없다. 쪽지함이 미어터질 테니까.

그 다음에는 매의 눈으로 정말 처음 쓰는 것 같은 쪽지를 골라낸다. 나이가 어린 것이 중요하지는 않은데, 경험이 없는 것은 중요하다. 어디서 길들여져 온 상대는 싫다.

주로 카톡 아이디 정도는 바로 보내온다. 요즘은 유독 라인이 많은데, 거른다. 내가 라인 계정이 없으니까. 새로운 계정 만들면서까지 노력하지 않아도, 이 바닥에는 나 같은 사람이 부족하다.

고르고 골라낸 쪽지에서 카톡 아이디를 읽어본다. 이 분야 전용 아이디 같지도 않고, 신선한 느낌이다. 곧장 추가를 해본다. 이런, 프로필에 떡하니 본인 얼굴이 있다. 예상한대로 앳된 얼굴이다. 대뜸 말을 건네 본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기다렸다는 듯한 타이밍. 마음에 들어.

어디 살아?

저는 OO동이요.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지만, 이런저런 신변잡기를 해본다. 걔의 답변 하나하나에 내가 관심을 못 느끼는 게 티가 나겠지만, 어쩔 수 없다. 넌 진짜 처음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벌써 38번째라고. 다행히 나름대로 고민의 시간을 가져본 아이 같다.

섣부른 호기심만으로 이런 곳에서 연락해오는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기대를 갖고 있다. 마치 인터넷에서 캣우먼 의상이랑 채찍이라도 주문해야 될 것만 같다. 진지한 사람들이라고 크게 다른 것도 아니지만.

어떤 거에 관심 있냐고, 최대한 심드렁한 티를 내지 않고 물어본다. 비슷비슷한 답변들이 돌아온다. 공통점이 있다.

너무 아픈 건 싫어요. 심리적인 게 좀 더...

내가 아주 약간의 기대감을 갖고 물어보는 질문들은 매번 정해져 있다. 가령 이런 것들.

길고 가느다란 막대기, 짧고 굵은 막대기 중에서, 넌 뭐가 좋아? 비슷한 강도로 맞는다는 가정 하에.

이때까지 한 번도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뭔가 처음부터 끝까지, 예상 못했거나 과거에 보지 않은 것이 하나 없다. 상관은 없다. 어차피 결말은 정해져 있으니까.

근데 언제부터 이런 거 해보셨어요?

글쎄, 매번 똑같은 결말인데 그게 의미가 있는 질문이려나.

있잖아.

네?

진짜 나 같은 성향인 사람은 누굴 괴롭히고 싶거나 때리고 싶은 게 아냐. 결국 귀찮아하게 돼.

뭘요?

그냥, 다. 너 같은 애가 바라는 것들을 해주는 것보다는 안 해주는 편이 나 같은 사람한테는 더 만족이 된다는 거지.

오늘도 그렇게, 가장 이해를 못할 상대에게 가장 솔직한 속마음을 얘기해버린다.

내가 누군가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느낌은 참 버겁다. 환상도 그러할진대 현실이라면 생각도 하기 싫다. 사라지고 싶다. 사라져야만 느껴지는 쾌감이 있다.

그럼 왜 굳이 타인이 원하는 것을 내가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보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냥 확인만 한번씩 해보면 된다.

만나서 반가웠어.

차단, 삭제. 짧은 의욕의 짧은 꼬리. 그렇게 38번째 시도는 끝난다. 한숨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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