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essay] 저마다의 욕망과 좌절, 〈행복한 그림자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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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밤에 잠 못 드는 이유는, 세계 평화나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때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나의 작은 욕망들이 좌절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과 뜻하는 대로 관계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잠 못 이루고 뒤척인다. 어떤 때는 며칠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해결된 그런 일 때문에 침울했고, 세상의 모든 고민을 끌어안은 사람이 되곤 했던 것이다.

 예전에 동료와 작은 갈등을 겪은 적이 있다. 사실 그것을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조차 애매하다. 드러난 다툼이 아니라, 우리들만 알고 있는, 어쩌면 나만 알고 있는 감정의 소모였기 때문이다. 그가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드는데, 난 딱히 그걸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속에선 계속 그를 향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쉽게 말해 하는 꼴이 맘에 안 들었던 것이다. 내가 속한 그룹을 생각하면 앞에서 이끄는 그를 향해 대놓고 지적하기도 어려웠고, 지적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나로서는 해결책이 없는, 그런 문제를 끌어안고 혼자서 갈등했던 것이다. 그를 볼 때면 홀로 그와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가 알았는지 몰랐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문제는 자연발생적으로 해결되기는 했으나, 한 이틀 간을 괴로움 가운데서 보내야 했다. 남들에게 보이지도 않는 괴로움이었고, 그렇다고 객관적으로 대단한 고민도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서 그 갈등과 심정은, 세상의 모든 평화가 무너져 내리는 것과 맞먹는 파급력으로 다가왔다. 잠 못 이루고, 수시로 심장이 덜컹댔다.

 우리는 저마다 끌어안고 있는 고민과 욕망으로 꿈틀대고 몸서리친다. 내가 가진 욕망과 괴로움은 남이 볼 땐 아무 것도 아닌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내 안에서 그것들은 메가톤급 폭탄으로 자리한다. 사소한 욕망이 꺾여버렸을 때, 소망하고 바라던 일이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때,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폭탄은 내 안에서 터지고, 마음은 쑥대밭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의 단편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저마다 내면에 작은 욕망들을 안고 있다. 앨리스 먼로는 주인공의 사소한 일상들을 보여준다. 세계 평화에 대해 말하거나, 거대한 담론을 들이밀지 않지만, 우리는 그 소설 속 주인공들의 행적과 내면의 변화를 보면서 마음의 진동을 느낀다.

 주인공들이 안고 있는 사소한 욕망과 내재된 갈등들이, 제 3자의 입장에선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당사자에겐 삶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라는 걸, 읽는 우리는 다들 느낀다. 먼로는 이야기 속에 씁쓸한 반전의 한 순간을 심어둔다. 그 한 순간은 앞에서 달려온 이야기와 마무리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 놓으며 읽는 이의 마음도 들었다 놓는다.

 원하는 것의 좌절, 원하는 것들의 충돌, 원하는 것이 뜻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 먼로의 소설은 이런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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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을 원했던 글 쓰는 중년 여성이 작업실을 갖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은 방해로 인해 작업실을 정리하고 나와야 했던 이야기.
-다른 친구들에게 하찮은 존재로 취급받던 여자 아이가, 우연히 만난 한 친구와 교감을 나누게 되는데, 얼마 뒤 여자 아이가 중병에 걸려 입원하는 이야기.
-잡다한 물건을 팔고 다니는 아빠. 그는 삶의 고단함을 긍정적인 자세로 견뎌낸다. 어느 날 아빠의 옛 친구의 집을 찾게 된 아빠는 평소와 다른 활기찬 모습을 딸에게 보인다. 일상에 찌들린 현재의 아빠 모습이 아닌, 딸이 본 적 없는 밝은 그 옛날 아빠의 모습을 엿보는 이야기.
-동네의 오래된 집에 사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한 여자. 어린 아들을 데리고 아들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는데, 그곳에 모인 어른들은 동네 집값이 떨어 질까봐 할머니의 오래된 집을 허물어야 한다는 의견을 모은다. 미약한 반대를 하며 마음이 떨리는 여자의 이야기.
-할머니의 간섭 때문에 하고 싶은 걸 맘대로 못하는 소녀. 늘 마음대로 놀러 가고도 싶고 친구들과도 어울리고 싶다. 그러나 할머니의 가게를 방문한 한 최면술사가 할머니에게 최면을 걸고, 그 때문에 할머니는 죽음을 맞는다. 울먹이는 소녀 앞엔 그동안 바라던 길이 열린다. 소녀가 느낄 수 있는 양가의 감정들.

 이렇게 먼로는 인물이 원하는 것이 좌절되었을 때, 또 원하는 것을 예상치 못하게 이루게 됐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여 그 감정에 휩싸이게 한다.

찬사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가 있을까. 앨리스 먼로는 우리가 아는, 익숙한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 점을 독자들이 봐주길 바란다고. 먼로의 얘기를 듣고 나도 깊은 생각에 잠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들, 닳아빠진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들에 난 어떻게 접근할까. 내가 아는 흔해빠진 경험과 이야기들을 어떻게 재단하여 새로운 접근을 이루어낼까, 하고.

 앨리스 먼로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읽으면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이후 오랜만에 삶의 뒤편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뛰어난 단편들이고, 먼로는 거장이다. 인생에서 쓴 맛을 다시게 하는 일순간의 시간을 포착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그 맛을 보게 한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할 만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어렴풋이 이해하는 인물들, 또 작은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행동하는 인물들. 그 인물들은 복합적으로 내 안에 있고 내 주변에 있기에 이들 이야기에서 스파크가 튄다.

 단편 소설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은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노벨문학상의 무게가 이 책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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