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현재

흐익! 그렇지 않아도 저의 주절거림이 폭발하는 여행기인데, 두 편으로 나누어 썼던 것을 하나로 합쳐서 엄청나게 길어져 버렸어요.
이 글 읽어주실 이웃분들에게 미리 죄송한 마음이...
슬렁슬렁 쉬어가며 읽어주셔요. :-)


코소보 프리즈렌에서 출발한 버스는 해가 질 무렵 몬테네그로 코토르에 도착했다. 이 땅에 붙여진 이름답게 암벽으로 이루어진 '검은(negro) 산(monte)'이 위풍당당하게 아드리아해를 마주하고 있었다. 국경을 넘은 이후로 중간에 들른 휴게소 매점에서 콜라를 사 마시다가 '물가가 최소 두 배 이상 비싸졌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된 것 외에 특별한 무언가를 전혀 찾지 못하고 있었던 내게는 제법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는 돌산 때문인지,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천진난만하게 앉아있는 거대한 삐삐머리 소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전에 본 적 없는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달까.

유고연방이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그 순간 몬테네그로에 있었던 누군가가 보내온 이메일 속 글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게 2006년이었으니까 몬테네그로가 독립국이 된 지 이제 십 년이 지난 셈이었다. 모니터 위를 수놓은 수많은 느낌표와 함께 독립을 맞은 몬테네그로의 축제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 들을 수 있었지만, 나는 그때 몬테네그로가 어디 붙어있는 나라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 나라는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희미하기만 했다. 기묘한 '검은 산'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도장처럼 꽝꽝 박히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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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or, montenegro, 2015

호스텔 리셉션의 직원은 내 눈앞에 지도를 펼쳐놓고 장문의 대사를 외듯 코토르에서 반드시 가보아야 할 장소들을 빠르게 훑어나갔다.

"요새에 오르면 판타스틱한 뷰를 볼 수 있을 거야."

로봇처럼 읊조리는 그녀의 표정에 피로와 지루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입장료를 내지 않고 코토르 요새에 오르는 방법까지, 그 입구는 지도상에 별표로 표시해두는 세심함과 함께, 잊지 않고 일러준 그녀에게 진심을 담은 미소를 날려주었다. 나는 사실 판타스틱한 뷰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것을 보기 위해 어딘가 높은 곳에 올라야 한다면 더더욱. 그러나 디테일을 담은 그녀의 제안 덕분에 '코토르 요새에 올라 판타스틱한 뷰 감상하기'는 어느새 코토르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첫날의 다짐과는 달리 코토르를 떠나겠다고 결정한 날에야 의무감 비슷한 것으로 겨우 그곳에 오르게 되었는데, 일이 이 지경이 되기까지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코토르는 듣던 대로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지독했다. 골목마다 바글거리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걷는 일이나 두 배는 비싸진 메뉴판의 가격 때문에 밥 먹을 곳을 고르기 위해 조금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 따위는 견딜 수 있었다. 사람이 몰리고 물가가 비싼 여행지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 문제는 코토르 구시가지를 거닐고 있으면 디즈니랜드와 같은 거대한 테마파트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성벽의 입구를 지날 때부터 롯데월드에 입장하는 기분이 들었으니 거대한 삐삐머리 소녀 인형이 이에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길을 걷다 아이스크림을 사 먹거나 상점에 들러 쇼윈도에 진열된 물건들을 구경할 때도, 눈부신 아드리아해의 해변을 끼고 그림처럼 늘어선 크루즈선과 요트들을 바라볼 때조차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나는 하루 만에 이 꿈과 환상의 나라에 질려버렸다. 오만한 여행자의 배부른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생활의 냄새라고는 조금도 나지 않는 코토르 테마파크가 싫었다.

요새에 올라 그 절경을 눈에 담고도 '아름답긴 하네'하고 건성으로 친구와 감상을 나누었다. 내려오는 길에는 미끄러운 돌바닥 위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그나마 남아있던 양심으로서의 감동마저 사라졌고, 입구까지 다 내려와 공동 수돗가에서 물을 한 바가지 들이키고 나서야 '아, 좋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는데 그것만큼은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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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or, montenegro,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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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or, montenegro,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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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or, montengro, 2015

마지막 날에는 성곽 밖 해자에 둥둥 떠 있던 상어 모형을 바라보며 '어째서 상어일까'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하다 도망치듯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그리고 드디어 코토르를 떠난다는 생각에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도 싫었으면 진작 떠났으면 될 일이지 왜 나흘이나 이곳에 붙어있었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할 말이 없다. 배낭여행자는 대체로 현명하고, 가끔 놀라울 만큼 멍청하니까. 어쨌든 코토르 테마파크 안녕!

자그마한 나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발칸반도를 여행하면서 좋았던 점 중의 하나는 길고 지루한 이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코토르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로 향하는 버스는 밤새 달려 다음날 새벽이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야간버스였다. 누구도 우릴 가두어두지 않았는데 코토르를 떠나며 우리는 해방감을 느꼈고, 간만의 야간버스에 조금은 설레는 기분마저 들었다. 40인승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버스 안에 승객은 우릴 포함하여 다섯 명 남짓이었다. 그리 덥지도 않은 날씨였는데 기사 아저씨는 거의 텅 비다시피 한 버스 안에 에어컨을 풀가동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간은 '아, 시원하다', '아, 쾌적하다' 하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수화물 칸에 실어둔 가방에서 두꺼운 스웨터를 꺼내 입고, 기사 아저씨에게 에어컨을 꺼달라고 요청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몸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유난히 목청이 큰 기사 양반은 바로 뒷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 승객과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온몸을 흔들며 와하하 웃기도 하고, 자꾸만 고개를 돌려 뒷자리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는 통에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믿기 힘든 사건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그들이 캔맥주를 따서 들이키기 시작한 것이다. 버스가 휴게소에 잠시 섰을 때 젊은 남자가 캔맥주와 과자 나부랭이 사서 들어왔는데 그가 결국 갖고 있던 캔맥주를 따서 기사 양반에게 건넸다. 그 둘의 행복한 시간은 맥주와 함께 밤이 새도록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아, 맥주를 마시며 운전에 집중하지 않고 연신 떠들어대는 기사 아저씨가 운전하는 버스에 몸을 싣고 있다. 그들을 말릴 만큼 배짱이 두둑하지도 오지랖이 넓지도 않은 나는 그저 두 눈을 부릎 뜨고 그들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가 중간 어디쯤인지 모를 곳에 버스가 멈췄다. 오줌이 마려워 발을 동동거리며 화장실을 찾고 있는데 싱글벙글 기사 아저씨가 다 쓰러져 가는 터미널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조명이 모두 꺼져 있는 어두컴컴한 건물 안의 화장실에서 후다닥 볼일을 보고 나온 내게 아저씨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노란 봉지에 든 사탕을 건넸다. 맥주 한 잔에 기분이 좋아진 건지 원래 이렇게 와하하, 싱글벙글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사탕 봉지를 까서 새콤한 레몬 맛 사탕을 입에 집어넣으며 그제야 아저씨를 바라보고 나도 으헤헤 웃었다. 원래 웃음은 금세 옮아간다. 그가 사탕을 주어서 웃은 것은 아니다...

'술은 이제 그만 마셔요, 제발! 한 캔 더 따서 마시면 그때는 버스에서 내려버릴 거예요!'

라고 생각했지만 잠에서 깨어나 보니 우리는 목적지 모스타르에 도착해 있었다.

새벽의 공기는 차가웠다. 밤새 벌벌 떨며 새우잠을 자는 동안 굳어진 몸을 억지로 펼쳐보았다. 아직 어둠이 옅게 남아있는 차가운 공기와 한산한 도로 위를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들, 회색의 건물 벽 위에 벌집처럼 남은 총알 자국들 덕에 온몸이 더욱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폭격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파괴된 건물들은 철거되지 않은 채 입을 쩍 벌리고 길 위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격전지였던 이곳 모스타르 곳곳에는 지금도 여전히 전쟁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I LOVE MOSTAR'라는 글씨와 함께 하트 모양 풍선을 들고 있는 남자아이의 그림이 폭격을 맞은 건물의 한 벽면 전체에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을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카메라에 담았다. 그제야 움츠린 몸을 한번 펴고 다시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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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ar, bosnia and herzegovina, 2015

하루를 시작하기에 아직은 이른 아침, 지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조용한 골목을 얼마간 헤매다 예약한 숙소를 찾아냈다. 꼭두새벽부터 집주인을 깨워야 하는 것이 미안했지만 마땅히 머무르며 시간을 때울만한 장소도 보이지 않아 고민 끝에 초인종을 눌렀다. 걱정과 달리 주인아주머니는 당황한 기색 없이 현관문을 열어 낯선 나라의 손님들을 반겨주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서둘러 정돈하는 그녀에게 소곤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그녀를 따라 들어간 방은 침대와 작은 탁자만으로 이미 꽉 들어찰 만큼 작았는데 다락방 같은 느낌이 사랑스러웠다. 나무판자를 댄 비스듬한 천장과 핑크색의 벽, 삐걱삐걱 소리가 날 것 같은 낡은 나무 침대, 조금은 삐딱하게 벽에 걸린 정물화까지. 서둘러 예약한 숙소 치고 너무 완벽한 공간이었다.

그녀는 감탄하고 있는 우리를 방에 남겨두고 나가더니 금세 뜨거운 차와 대추야자 몇 알을 쟁반 위에 내왔다. 아, 다락방에 새어 들어오는 희뿌연 새벽을 맞으며 마시는 뜨거운 차와 달콤한 주전부리라니. 뜨거운 차 한 모금을 들이켜고 말끔히 정돈된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몸을 뉘었다. 간밤의 여독이 깨끗하게 씻겨져 내려갔다.

발칸의 나라들을 여행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것이라고는 비행기 표뿐이었다. 다음 방문할 도시의 지도를 받아두는 일이나 머무를 숙소를 예약하는 일은 여행을 하며 그때그때 해결했다. 여행지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운과 시간의 몫으로 남겨둬 버린 지 오래인, 마음을 비우고 여행하는, 음 그러니까. 그래, 그냥 게으른 여행자, 그 말이 가장 정확하다. 대강의 루트가 완성된 것은 발칸을 여행하기 전에 거쳐왔던 인도 마날리에서의 일이었다. 4년 전 인도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와 마날리에서 우연히 재회하게 되었는데, 그는 곧 발칸으로 건너간다는 우리의 여행 계획을 듣고 몹시 반가워했다. 신기하게도 그날 저녁 함께 모여 식사를 했던 사람 중 이미 발칸 땅을 밟은 여행자가 둘이나 더 있었고, 나와 친구는 셋의 발칸 이야기를 들으며 그제야 얼기설기 루트를 완성해 나갔다. 그들은 발칸의 추억들을 곱씹으며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 동네 가면 다리 위에서 맨몸으로 강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을 볼 수 있어요."

그곳이 바로 모스타르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어느 작은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과 같은 느낌을 풍긴다고 생각했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그 순간 유난히 반짝였던 것 같기도 하다. 웃통을 벗고 높은 다리 위에서 차가운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젊은 남자들이라. 틀림없이 전설적인 면이 있다. 그 술자리의 분위기는 이를 거들 뿐이었고.

주인아주머니가 내어준 대추야자와 뜨거운 차가 어느새 사라지고 몸이 한결 따뜻해졌다. 전설 속의 다리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구시가지로 향했다. 다락에 머무르는 사이 새벽의 어둠은 저만치 물러나고 하늘과 강물이 있는 힘껏 파랑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듬성듬성 심어진 나무가 만들어내는 무늬 위로 콕콕 박힌 빨간 지붕의 집들과 곳곳에 솟은 미나렛이 보였다. 버스터미널에서부터 걸어오며 보았던 살풍경과는 다른 아기자기한 마을의 모습이 네레트바 강가를 따라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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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ar, bosnia and herzegovina, 2015

크고 작은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구시가지의 골목은 이스탄불 바자르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진열된 물건들도, 아저씨들의 꼬부랑 수염도 그랬다. 제국의 흔적이 짙게 남은 곳이었다. 보스니아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레스토랑 입구에 서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얼핏 보아도 끝내주는 뷰와 함께 근사한 테라스를 가진 레스토랑이었다. 나는 '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저녁에는 꼭 이곳에서 보스니아 전통 음식과 함께 모스타르 맥주를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아름다운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아껴 걸었다. 그리고 그 길의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너도나도 탄피로 만든 기념품들을 수북이 쌓아놓고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손가락만큼 작은 것부터 팔뚝만큼 굵은 포탄 탄피까지. 잘은 몰라도 모스타르 땅 곳곳에, 걷다 보면 발에 밟히는 것이 온통 탄피였을 것이다. 버텨낸 사람들은 어떻게든 오늘을 살아내고 지금을 만들어야 할 테니 사방에 널린 탄피들을 줍기 시작했을 테지. '그땐 그랬지'하며 발칸의 과거를 떠올리기엔 아직 이른 시간인 걸까.

앞서 걷고 있는 사람들의 뒤통수 너머로 다리가 보였다. 전설의 다리는 오래된 다리, '스타리 모스트'라고 불렸다. 다리의 이름을 따서 도시의 이름이 지어졌을 정도이니 이곳 사람들에게 스타리 모스트가 어떤 의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스타리 모스트가 보스니아 내전의 끔찍한 메타포가 되기 이전 이 다리는 이곳 사람들이 '아무 일 없이' '사이좋게' '잘' 살고 있었던 시절의 상징이기도 했다. 다리 하나를 두고 건너편에는 무슬림들이 이쪽 편에는 크리스천들이 살고 있었지만, 건너편엔 모스크가 있고 이쪽 편엔 교회가 있다는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시절 말이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마침 다리 위에는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전설의 다이빙맨'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이들이었다. 다리 위에 운집한 사람들 덕분에 한 걸음을 내딛기가 힘들었고, 까치발을 들어 뛰어내리는 사람의 정수리만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정도 높이에서 뛰어내려도 안전할 만큼 수심이 깊은 강인가 보구나 생각하며 심각해지려던 찰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다이빙맨이 네레트바 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뭐야, 시시하게."라고 내뱉어버리고 만 것은 그 광경이 내가 생각한 전설과 같은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의미를 가진 다리 위에서 벌어지는 의식(?)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관광객들을 위한 이벤트에 가까워 보였다. 이곳 젊은이들의 전통적인 성인식(?) 비슷한 것이라는 글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정말 어떤 이유로 처음 다이빙을 시작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 시작이 어찌 되었든 덕분에 스타리 모스트는 이렇게 여행자들의 입과 입을 거쳐 더욱더 '전설'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이곳에서 세계 다이빙 대회까지 열린다고 하니 말이다. 100년쯤 지나면 '옛날 옛적에~' 하고 시작되는 진짜 옛날이야기가 되어 있겠지. 그때는 '그땐 그랬지'하며 옛날이야기 하듯 발칸의 과거를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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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ar, bosnia and herzegovina, 2015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진 나라라고 한다. 모스타르 사람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대체로 '보스니아'로 불리곤 한다는 사실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모스타르는 지역적으로 헤르체고비나였던 곳이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사는 곳의 이름이 바뀌는 것 정도야 살아낸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의 부모가 살고, 또 나의 부모의 부모가 살았던 곳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다리 건넛마을 사람들에게 갑자기 총구를 들이대고 싸워야 한다면 그것은 나와 내 가족의 지금을, 어제를, 내일을 통째로 뒤흔든 일이었을 것이다. 역사 운운하며 진지해질 겨를이 없다.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지금'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코소보를 찾은 외국인들은 코소보 사람들에게 여전히 묻곤 한다.

'당신은 세르비아 사람입니까? 알바니아 사람입니까?'

그 질문에 한 코소보 친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내뱉은 대답은 발칸 반도를 여행하며 혼란을 느끼고 있던 나에게 소중한 지침이 되었다. 그 이후로 계속된 여행에서도 유효했다. 그는 분명, 단호하게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저는 세르비아 사람도, 알바니아 사람도 아닙니다. 저는 코소보 사람이죠.'

전쟁은 끝이 났지만,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들 했지만 새로 시작된 것은 없었다. 발칸에서 현재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처럼 보였고, 앞으로도 영원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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