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사색]전교1등하던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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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moon by @marginshort)

2014년 어느날 회사 근처에서 점심을 먹으러 가다, 넥타이 맨 낯익은 남성 하나를 마주쳤다.

고등학교 때 전교 1등 하던 놈.

나름 학교 다닐 때 성적이 상위권에 있어서, 당시 학교에 별도 공간을 마련해 선교 석차 몇등까지는 방과후 자리를 옮겨 자율학습을 할 수 있게 해 준 적이 있었는데 그 녀석은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중간인지, 기말인지 시험을 앞둔 때라 엄청 쓰고 줄치고 외우다 한 숨 돌리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녀석을 봤다.

이 놈은 다리를 꼬고 드러눕다시피 앉아서 한 손은 턱을 괴고 한 손은 일반사회 교과서를 든 채 마치 한가한 때에 소설책을 보는 것처럼 눈으로만 공부하고 있었다. 책상 위엔 볼펜 한자루 없었다. 그냥 교실 제 자리에서 일반사회 책 한권만 달랑 들고 휘적휘적 자습실로 온 것 같았다.

중학교도 동창이었지만 같은 반인 적은 없었다.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반반해서 중학교 때부터 여자친구가 항상 있었던 녀석. 공부도 엄청나게 잘하면서 축구면 축구 농구면 농구, 못하는 운동이 없는 녀석. 그런 반신(半神) 같은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친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졸업 뒤 나는 재수를 했고, 그 녀석은 서울대 건축학과인지를 갔고, 나중에 군복무도 육군훈련소인지 어디 조교로 마쳤다는 얘길 들었다.

근데 2014년에 본 녀석의 모습은 그냥 회사원이었다. 고등학교 때 모습을 보면 무슨 의사나 변호사나 뭐 그런 게 될 줄 알았는데, 공부 암만 잘해도 결국 똑같은 회사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교동 일대에서 지나치는 수많은 직장인들처럼 넥타이를 매고 삶에 이리저리 치이는...

당시 나는 입사 6년차(만 4년)로 꼴에 기자라는, 새내기들의 허세가 빠져 나가고 회사나 업계에 불만과 비판이 자라나던 시기였다. 녀석을 보고 와서 페이스북에 별 두서없는 매마른 글 하나를 끄적였다.

엊그제 점심을 먹으러 가다 무교동에서 고등학교 때 전교 1등 하던 애를 봤다. 졸라게 쓰면서 외우고 있는데 맞은 편에 앉아 다리 꼬고 소설책 읽듯 교과서 읽던 놈. 한 번도 1등 안 놓치면서 농구, 축구 다 잘하고 훤칠하니 인물도 깔끔해서 여친도 있던 놈. 당연하게시리 서울대 간 놈.
근데 엊그제 보니 그냥 회사원이더라.

그런데 더 재밌는 건 그녀석을 작년 여름 또 마주쳤다. 당시 애인이었던 아내와 나는 뜨거운 어느 일요일에 출근 뒤 점심 때 잠시 만나 밥을 같이 먹고 각자의 출입처로 돌아갔다. 우리는 식사 뒤 경의선 숲길의 공덕동 구간을 걸었는데 그 녀석은 거기에 가족과 함께 나와 일요일을 즐기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그 동네 사는 사람. 씻지 않은 것 같은 얼굴. 감지 않은 머리를 감추기 위해 쓴 모자. 반바지에 맨발 슬리퍼. 비슷한 차림의 아내, 유모차와 아기.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사는 그 동네 주민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똑같은 직장인이 아니었다. 서울대를 나온 직장인은 일요일에 쉬면서도 벌써 마포구의 좋은 아파트에 수억원짜리 집을 얻었고, 벌써 결혼해서 아기가 있었다. 나는 기자랍시고 어깨에 힘만 들어갔지 모아둔 돈에 빚을 왕창 내도 마포구에 아파트커녕 빌라도 어려웠다. 당시엔 결혼과 비용 문제로 고민이 많은 때였고, 당연히 그 놈이 부러웠다.

더운 일요일 근무를 하다 보니 1년 전 쯤 만났던 녀석이 생각났다. 얌마, 너 오늘 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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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jjal by @tat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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