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들은 어디서 세상을 보는가

사람들은 처음부터 교수를 믿지 않았다. 교수들은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하는가. 이 사회의 도저한 문제들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그런 연구는 왜 눈을 부릅 떠도 찾아볼 수가 없는가. 왜 언론학 교수 중에는 '저널리즘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해 연구하는 이들이 없는가. 최근 수년간의 논문을 다 뒤져봐도, 언론 보도가 어떤 영향을 줬고, 우리 사회의 제도와 문화가 어떻게 바뀌었단 그런 연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학이 현실의 언론을 연구하지 않고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영화 기생충에 대한 평론을 쓰면서 반지하 주거공간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뒤져봤다. 마찬가지였다. 한국 사회에 그동안 수백만명이 수십년 간을 거주한 반지하 주거공간에 대한 연구는 너무나 빈약하다. 깊이 있는 연구를 한 논문은 열편을 넘지 않는다.

애초에 교수들에게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가. 대학원생들을 부리면서 기업의 대표, 고위공직자들을 주로 상대하고, 주변에서 모두가 떠받들어주다 보니, 그저 교수란 사회 지도층이란 '계급'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이들은 세상에 필요한 연구는 안하고 외국에서 수입한 이론과 용어로 현학적인 말과 글로 대단치 않은 내용을 이상하게 포장하면서 그들 사이에서만 유통한다. 최근 몇 년간 세상에 중요한 영향을 준 학계의 연구로 기억나는 것이 있는가. 교수는 도대체 어디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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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며칠동안 많이 공유된 칼럼을 패러디 해봤습니다.
윤태진 교수의 칼럼 - 기자들은 어디서 세상을 보는가

위에 쓴 글은 그저 패러디일 뿐, 제 생각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오히려 저는 저런 글을 싫어합니다. 그걸 알리려는 취지로 썼습니다.

저도 그동안 언론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많이 써왔습니다. 제가 쓴 책 <공약파기>에도 적지 않은 분량이 '정치 저널리즘에 대한 비판'이고, 벌써 7개월 넘게 격주로 쓰고 있는 미디어오늘 칼럼에도 거의 매번 저널리즘에 대한 비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자들 월급이 가파르게 올라 이젠 만원버스를 안 타고 다녀서, 또는 기자들 주변에 비정규직 노동자보단 기업 임원이 많아서 '사람들이 점점 신문을 믿지 않는다'고 쓰진 않습니다. 하나의 직종, 직업 전체의 특성을 규정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일을 하려면 적절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언론에 불편한 점을 목도했으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가설을 설정하고, 그 가설이 맞는지 적절하게 검증한 이후에 근거를 제시하며 주장을 해야합니다. 그게 학자로서 기본 자세일 뿐 아니라, 주장하는 글의 필수 요건입니다.

공유한 칼럼이 언론인에게 '나는 어디서 세상을 보고 있는가'라고 자문하며 성찰의 기회를 주고 있긴 하지만, 글에서 기자들이 '서울의 대기업 옥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단 근거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저 인상 비평일 뿐이고, 근거 없는 주장의 나열에 그치고 있죠.

저는 공대를 나와 경제매체, 보수언론, 진보언론에 모두 몸담아 봤습니다만, '기자 월급이 가파르게 올라 승용차의 성능, 교통 체증, 휘발유 가격 같은 주제가 만원버스 이야기를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란 주장에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10개 남짓의 방송사, 보수언론, 경제매체는 상당한 월급을 받지만, 대기업 수준은 아닙니다. 더군다난 이들 이외의 매체에선 대기업 수준의 월급은 언감생심입니다.(굳이 숫자를 대며 근거를 나열할 필요는 없겠죠..) 물론 어느 매체든 정규직 기자는 다른 불안정 노동자들에 비해 여건이 나은 상황이긴 하겠죠. 하지만 급여나 처우로 인해 기자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단 것은 지나친 주장입니다. 똑같은 논리로 국회의원은, 보좌관은, 장관은, 고위공직자는, 지방의회 의원은 급여나 처우가 좋아서 문제인 걸까요?

언론에 있어 더 심각한 문제는 비즈니스모델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점입니다. 광고효과 없는 광고를 잘 팔기 위해선 광고주에게 영향력 있는 기사를 쓰거나, 광고주에게 도움이 되는 기사를 써야 합니다. 독자보다 광고주 눈치를 더 봐야하는 언론의 현실이 진짜 문제입니다. 그나마 '가파르게 월급이 오른 기자'들은 '그걸' 잘하는 매체의 소속입니다. 만원버스보다 승용차의 성능을 언론이 더 자주 다루는 이유도 광고 때문입니다. 아마 윤태진 교수가 불편해하는 언론의 행태 중에 상당수는 언론의 비즈니스모델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이미 부동산 자산을 많이 보유해 단기 경영실적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 기득권과의 네트워크를 공고히하는 게 목표인 언론도 있습니다.

칼럼에 등장한 '새벽버스'의 사례를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해봐도, 윤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사례들이 잔뜩 나옵니다. '버스', '새벽', '첫 차', '노동자' 등의 검색어를 이리저리 조합해 검색해보면, 1990년대와 2000년대는 오히려 관련 기사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2010년대에 주로 기사가 나오죠. 그리고 죄다 진보언론에서 나온 기사들입니다. 윤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기자들의 월급이 가파르게 오르기 전엔 왜 그런 취재를 안 했을까요. 윤 교수는 과거의 언론이 괜찮았다고 보는 모양인데요. 자신의 논리로 자기 주장이 격파당하는 자가당착의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1974년에 발간된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저)를 인용해볼까요.

"기자는 수습 또는 견습이라는 ‘미완성’의 자격으로서도 출입처에 나가면 위로는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은행 총재로부터 아래로는 국장, 부장, 과장들과 동격으로 행사하게 된다. 그들이 취재 대상의 하부층과 접촉하는 일은 오히려 드물다. 장관이나 정치인이나 사장, 총재들과 팔짱을 끼고 청운각이니 옥류장이니 조선호텔 무슨 라운지니 하면서 기생을 옆에 끼고 흥청댈 때, 그 기자는 일금 1만 8000원 또는 고작해서 일금 3만 2000원이 적힌 사내 사령장을 그 날 아침 사장에게서 받을 때의 울상을 잊고 만다. 점심은 대통령 초대의 주식, 그것이 끝나면 은행 총재의 벤츠차에 같이 타고 무슨 각의 기생 파티에서 최신 유행의 트로트 춤을 자랑하고 이튿날 아침은 총리니 국회의장의 “자네만 오게”라는 전화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참석하는 꿈이 남아 있다. 이런 기회는,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지만 출입처에 나간다는 기자에게는 반드시 있다."

요즘 기자에겐 이런 기회가 없습니다. 칼럼에서 인용된 '중견기자'에겐 간혹 있나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국회의원과 동격은 커녕 국회 바닥을 자신의 옷으로 걸레질하며 타이핑하는 게 일상입니다. 누구를 편드는 기사가 아님에도 '기레기'라는 조롱 댓글을 받는 게 현실입니다. 매체가 많아지고 '기레기'라는 언론혐오 현상이 심한 이 시대에 언론계에 진입한 이들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기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 칼럼이 꽤 많이 공유됐지만, 경력 10년 미만의 젊은 기자 중엔 공유하는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 칼럼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긴 글을 썼지만 제 생각도 편향됐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나는 어디서 세상을 보는가'는 누구나 자주 자문하고 성찰해야할 중요한 문제제기입니다. 세상을 향해 질문하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잘 듣고, 확성기 역할을 해야하는 기자라면 더더욱 그런 성찰이 필요하죠. 이 칼럼은 좋은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게으른 글쓰기로 인해 결과적으로 언론을 혐오하는 현상에 편승해, 그 혐오의 확대재생산에 기여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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