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30.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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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대학생 때였다. 영화를 본 후 감상문을 제출해야 했던 과목 때문에 그해 추석 연휴에 친척들과 함께 영화를 봤고, 내 감상문에 도움을 주고 싶으셨던 친척분은 나에게 이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 알겠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돈 때문에 상우(유지태)를 버리고 간 은수(이영애)가 나쁜 것 같아요. 상우가 불쌍해요.” 정도로 말했고, 내 눈높이를 파악한 그분께서는 나에게 나중에 나이가 들면 다시 한 번 이 영화를 보라고 하실 뿐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대답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순진했다는 생각도 든다.

이후에 이 영화는, 빨간 목도리가 예뻤던 짧은 단발머리의 이영애, 김윤아가 불렀던 ‘봄날은 간다’로만 기억됐고, 후에 “라면 먹고 갈래요?”라며 개그 프로의 소재가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영화가 떠올랐지만, 딱히 다시 볼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31살의 나

몇 년 전, 무슨 마음에서였는지 혼자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당시 내 나이는 2001년의 이영애 씨 나이와 같았고(극 중에서 상우와 은수의 나이는 밝혀지지 않지만, 2001년의 유지태 씨와 이영애 씨는 나이는 각각 26살, 31살이었다.), 그제서야 은수의 입장이 눈에 들어왔다.

상우 : "밤새 일하려면 피곤하죠? 식구들이 걱정 안 해요?"
은수 :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상우 : “결혼해요. 그럼."
은수 : “해봤어요. 한 번.”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라니. 묻지도 않은 질문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혼자임을 드러낸 은수. 게다가 담담하게 이혼 경력도 내비쳤다.
둘의 대화가 끊어지자 은수는 느닷없이 소화기 사용법을 아느냐고 묻고는 혼자 말하기 시작한다.


은수 : 라면 먹을래요?
은수 : 자고 갈래요?

순수하게 좋아하기만 할 뿐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상우 때문에, 관계를 진전시키는 것 또한 은수의 몫이다.


어느 날 상우는 은수에게 아버지께서 여자친구를 데려오라고 하셨다고 말한다.
은수는 상우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상우네 집안이 꽤나 고지식하며, 이혼을 경험한 은수가 쉽게 발을 내딛지 못할 곳이라는 것을 뜻하지만, 상우는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이후 새로운 남자가 등장하고, 그 남자와 은수는 또다시 소화기 앞에 앉았다. 은수는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해 소화기 사용법을 아느냐고 묻는데, 남자는 소화기 사용법은 모르지만 기분 전환하는 방법은 안다며, "맥주 한잔할래요?”라고 묻는다.

남녀 간에 이처럼 담백하게 호감을 전달하는 대사가 또 있던가?
어릴 적 나는 그가 그저 돈이 많은 남자라고 치부했지만, 그는 나이 어린 상우와 달리 대화와 관계를 이끌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은수는 상우에게 시간을 갖자고 얘기하지만, 상우는 그럴수록 더욱 매달리고, 이 상황을 해결할 자신이 없었던 은수는 상우에게 끝내 헤어지자고 한다. 매번 상우의 차를 얻어 탔던 은수는 그들이 헤어진 후, 독립을 의미하는 자신의 차를 구입했는데, 그저 은수가 새로운 남자를 만난다고 생각한 상우는 찌질하게도 은수의 새 차를 긁어버린다.


초여름에 헤어졌던 그들은 다음 해 봄, 벚꽃이 만개했던 어느 하루 은수의 요청으로 다시 만난다. 상우는 여전히 은수를 잊지 못했고, 은수는 그런 상우가 반갑다.

은수 : 우리 같이 있을까?
상우 : 갈게.
은수 : 어. 잘 가. 상우 씨.

은수가 호감을 내비치면 다시 넘어올 것만 같았던 상우였지만, 만남, 사랑, 헤어짐 그 모든 순간을 다시 반복할 자신이 없는 그는 담담한 어투로 은수를 보내고야 만다. 그런 상우에게 은수가 할 수 있는 것은 어색한 악수밖에 없다. 둘은 다른 방향으로 헤어지고, 걸어가던 은수는 혹여나 상우가 자신을 바라볼까 계속 뒤를 돌아본다. 처음 돌아봤을 땐 제 갈 길을 가던 상우가 두 번째 돌아봤을 땐 자신을 본다. 하지만, 손짓으로 안녕을 고한다.


당시엔 은수의 마음을 이해해보려 들지 않는 상우가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얼마 전 봄날은 간다 노래를 부르면서 이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봐도 은수의 입장일 줄 알았는데, 또다시 시간이 지나서일까? 그냥 둘 다 예쁘고 서툴러 보였다.


방송국 PD 이자 아나운서인 은수와,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는 겨울부터 초여름까지 함께 소리 녹음을 하러 다니며 사랑에 빠진다. 또한 그들의 감정 변화 또한 소리로 표현한다.


그 사람과 헤어지고 갈비뼈까지 아려오는 슬픔. 깨달음. 난 그 사람을 사랑했던 걸까요? 사랑한다고 한 마디도 못했는데.

첫 만남에 차량에서 함께 들었던 라디오 사연. 한참 후 헤어지고 느꼈을 은수의 심경이 아니었을까?


영화에서는 눈 밟는 소리, 개울물 소리, 대나무밭의 소리, 싸락눈이 내리는 소리, 풍경 소리, 빗소리 등 다양한 소리가 나오지만, 가장 와닿았던 것은 상우가 은수에게 아버지를 뵈러 가자고 한 다음의 장면에서 나온 세찬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바닷가에서의 소리였다. 은수는 그곳에서 답답한 현실에 대한 고민에 휩싸여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우는 그저 노래를 부르며 흥겨워한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나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가고 싶어 가나

매미가 울던 초여름 어느 날, 둘은 아리랑 녹음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다투기 시작했고, 화가 나서 한참 밖을 돌아다니다가 은수의 집에 돌아와서 상우가 발견한 것은, 자신의 물건으로 가득 찬 짐가방, 그리고 대화를 원치 않는 듯 돌아누워있는 은수였다. 31살의 나는 이 장면에서 대화 한번 시도해보지 않고 가버리는 상우가 답답하게만 느껴졌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혼자 고민하고, 혼자 헤어짐을 결정하는 은수 또한 답답해 보인다. 힘들어하는 이유를 상대에게 설명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은수도 아직 서툴렀다.


벚꽃 아래에서의 헤어짐 후, 상우는 어느 냇가에서 녹음한 은수가 부른 <사랑의 기쁨>을 듣고는 5월의 보리밭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바람에 살랑거리는 보리의 소리를 녹음하던 중 미소를 지으며 영화가 끝난다. 사랑의 기쁨은 잠깐이지만, 슬픔은 영원하다는 그 음악에서 위로를 받은 것인지, 은수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바람이 부는 보리밭의 소리로 덮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바람이 많이 부는 그곳에서 자신의 고민도 날려 보내버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상우는 성장했고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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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작가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미디어, 마나마인>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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