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뜨려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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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간사해서 좋은 기억보다는 안좋았던 기억만 유난히 떠오르는 법이다. 내 그림과 영화로 여기저기 지원했다가 낙방을 알렸던 수많은 메일의 한 구절씩 모아서 <매우 유감>이라는 작품을 작년에 만들었다. 그리고 밑에 사인을 했다.나를 비롯한 주변 창작인들은 항상 어딘가에 공모 지원서를 낸다. 예술의 모든 장르에서 작업 자체만으로 생계를 꾸리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평생 남들이 만들어놓은 예술 작품만 감상하면서 살아도 시간이 모자르다. 너무들 많다. 반대로 일평생 내 작업만 해도 시간이 모자르다. 창작은 굴레같은 것이다. 또 한 가지. 각종 공모 지원서만 쓴다고 하더라도 일평생을 다 할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끝없이 쏟아지는 공모에 지원하지 않으면 작가로서 존재할 수도 없다. 그만큼 기회가 많아서 좋은거 아니냐고? 글쎄. 작품보다는 공모 지원서가 작가를 만드는 시대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공모에 떨어진 경험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만약 붙었다면, 거기에 잠시 도취되어 지속가능성 없는 신기루같은 미래를 볼모삼아 그냥 흘러가기만 하다 끝나버렸을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떨어지면, 잠시 슬프다가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대개 '다음엔 꼭 붙어야지!'가 아니라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었지?'라는 자문이 들며 망해도 좋을 신나는 대안을 상상하게 된다. 이 자리를 빌어서 날 떨어뜨려준 여러 기관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이다. 난 지금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있다.




@thel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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