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와 재현의 윤리 : 세월호 재현하기



오늘 아침에 일어나 피드를 보다가 @sleeprince 님의 나는 왜 빈곤 포르노를 싫어하는가를 읽었다. 이런 글을 보면 눈이 번뜩인다. 창작자로서 나도 언제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타인의 가난을 자극적으로 대상화시켜서 재현하는 모든 창작물에 대한 문제 제기다.

@sleeprince님이 언급하셨듯, 악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피사체의 가난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창작자의 선량한 의도를 담은 작품조차 '가난 포르노'의 범주에 언제든지 속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나는 창작자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결론 없이 다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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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의 윤리



사회적 약자를 소재로 다루는 모든 예술 작품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내가 과연 작품이라는 핑계로 저들을 이용하지는 않았는가!' 라는 죄책감을 마음 한켠에 담게 된다. 그러나 대게 창작자와 감상자 모두 어떤 작품은 괜찮고, 또 어떤 작품은 괜찮지 않은 것인지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이런 문제를 다룰때 단골처럼 등장하는 유명한 사례가 있다.


케빈 카터는 1994년에 '수단의 굶주린 소녀'라는 작품으로 사진계의 최고 권위상인 퓰리쳐상을 받게 된다. 사진 안에는 곧 죽어갈 것만 같은 소녀가 있고,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는 곳에 독수리가 있다. 이 사진은 곧 격렬한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위험에 빠진 소녀를 구하는 대신 미학적 완성도를 위해 셔터를 먼저 누른 작가를 향한 비판이었다.


이에 대한 반론도 활발했다. 케빈 카터는 셔터를 누르자마자 달려가서 소녀를 구했으며, 이 사진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의 비극과 참상을 전세계인들이 알게 되었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이러한 논쟁이 작가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괴로운 일일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케빈 카터는 말년에 자살을 택한다. 케빈 카터의 사진은 '가난 포르노' 혹은 '재난 포르노'일까?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확실한 답을 갖을 수 없다. 다만 이분법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결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세월호 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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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작품은 포르노입니다



작년(2017) 초에 미술계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하나의 사건이 기억난다. 세월호 작품을 제작해서 전시한 A작가는 어느날 날벼락을 맞는다. B평론가가 자신의 세월호 작품을 보고 공개적으로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당신 작품은 포르노와 다를 바 없습니다.” 작가는 당황한다. ‘아니, 국가의 무능을 고발하고 희생자를 기리고자 만든 내 작품이 어떻게 포르노가 된단 말인가? 내 맘 모르고! 너무해! 너무해!’ 라며 억울해했을지도 모른다.


A작가의 작품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세월호의 대표적인 이미지 -바다 위에 올라온 뱃머리- 와 조명탄을 사실적인 입체물로 재현했다. 이 작품을 비판한 B평론가의 요점은 이러했다.

  • 타인의 가장 고통스런 순간을 스펙터클한 이미지로 손쉽게 소비했다. 죽음을 영상으로 찍어 유포하는 스너프 필름(구경거리)과 다를 게 없다. 명백한 포르노다.
  • 만약 세월호의 생존자나 유가족이 이 작품을 보았을 때 또다시 반복되는 고통을 고려하지 않았다.

즉 B평론가는 재난을 볼거리로 전락시킨 ‘미학적 소비주의’의 관점과 피해자의 2차 폭력을 고려한 ‘피해자 중심주의’의 관점에서 작품을을 비판했다. 한마디로 비윤리적이라는 것이다.


B평론가는 세월호 침몰 장면처럼 ‘재현하면 안 되는 이미지’가 있다며 만약 작가가 재난을 재현하려 한다면 이러한 윤리적 측면을 고려하여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너무나 옳은 말들의 연속이라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솔직히 A작가의 작품을 보고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내 뒷통수에 경종을 울리는 글이었다. 곧이어 침이 바싹바싹 말랐다. 안절부절했다. 나 역시 A작가처럼 세월호 침몰 이미지를 작업으로 사용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도 가해자인가



그럼 나도 선의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를 유린했으며 포르노를 생산한 사람이 되는 것인가? 나는 곧장 내 ‘범죄’ 사실을 인정하기보다는 저 논리에 반박하는 갖가지 반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론은 언제나 실패했다. 저 논리를 깰 수 있는 변명거리를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이대로 범죄자가 되는 것인가? 경솔한 내 행동을 유가족에게 고백하고 사과를 해야하는 것일까?

며칠간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첫째로 내가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려 할 때에 한 번도 '진지하게' 윤리적 측면을 고려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성했으며,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학적 소비주의’의 관점과 ‘피해자 중심주의’의 관점으로 그동안의 모든 창작자의 세월호 관련 작업을 심판하기에는 뭔가 이분법으로만 나눌 수 없는 여러 결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결론 없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세월호 재현하기



당시에 나는 곧바로 전시장을 찾았다. A작가의 작품을 직접 보고 싶었다. 봤다. 세월호네. 라는 것 이외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국가폭력에 대한 분노도 생기지 않았고, 희생자의 고통을 깊이 공감하지도 못했으며, 어느 필자처럼 재현의 윤리를 떠올리며 강렬하게 반응하지도 않았다. 그냥 멍했다. 아무도 올 것 같지 않은 외진 갤러리에 놓인 세월호가 조금 딱하게 보이긴 했다. 그게 전부였다. 왜일까? 무려 세월호 작품인데. 아마 나는 세월호 참사를 받아들였던 충격적인 시간 이후와, 재현의 윤리를 섬세하게 가늠할 수 있는 시간 이전의 텅 빈 공백에서 이 작품을 마주했다고 생각한다. 2년 전이라면 난 이 작품 앞에서 울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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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봄에 세월호가 침몰하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국가의 움직임이 있자 참사는 투쟁으로 이어진다. 그해 여름 광화문 광장에서 유민아빠는 죽기 직전까지 단식투쟁을 강행했다. 사람이 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무작정 그림을 그려서 광장으로 나가 며칠간 1인 시위를 했다. 지금 당장은 뭐라도 행동하는 게 우선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목표는 단순했다. 유가족의 고통을 널리 알리고,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주어서 행동하게 만들어 이 사건을 빨리 해결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 행동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때 내가 그린 그림은 유민아빠의 고통 그 자체였다. 재현의 윤리? 고려할 틈이 없었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건과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시점에서 그릴 수 있는 것은 1차원적이며 자극적인 이미지였다. 이후 세월호 1주기는 금방 다가왔으며, 역시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고 나는 안산 예술의 전당에서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하는 대규모 기획전에 내가 그렸던 그림을 내놓았다.


아직 참사의 충격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들이 그릴 수 있는 것은 뻔했다. 거의 모두가 1차원적이고 단순했으며, 재난의 스펙터클 이미지를 빌려 자극적인 작품을 전시했다. 당연하게도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는 이미지는 넘쳐흘렀다. 미술 비평의 윤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러니까 재난을 볼거리로 전락시키는 '미학적 소비주의'와 2차 폭력을 상기시키는 '피해자 중심주의'로 보자면, 그때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인가? 포르노 생산자였을 뿐인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차마 민망한 수준이어서 그때 그린 그림을 다시 볼 자신이 없다. 이 그림을 후회한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이 주어진다면, 아마 나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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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중심주의



작년에 오일권 감독이 제작 중인 극영화 <세월호>의 포스터가 공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빡치게 만들었다. "이 영화를 통해 선생님에 대한 학생들의 부정적 시각을 바로잡아 진정한 스승으로 승화시키고 희망을 전달하고자 한다" 라는 연출 의도와, 펀딩한 사람에게 '제주도 숙박권' 을 제공하겠다는 황당한 배경과 함께 이미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처럼 화려하게 재구성한 포스터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감독의 구구절절한 나름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세월호를 '악용'하고 있었다. 참사가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피해자가 처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속내가 빤히 보이는 경우에는 재난을 악용했다고 손쉽게 비판할 수 있다. 같은 논리로 A작가의 작품을 떠올려본다. A작가는 세월호를 악용했는가? 분명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작품은 '참사가 있다' 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참사가 있다'라는 건조한 사실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것의 사회적 역할이 끝났고, 그렇기에 2017년에 전시된 A작가의 작품 역시 현재 세월호의 본질을 꿰뚫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은 가능하다.


하지만 똑같이 '참사가 있다' 라는 건조한 이미지를 이용한 세월호 집회 포스터 디자인은 어떤가? 그것을 재난 포르노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또 세월호의 유가족이나 생존자가 아픔을 직면하는 치유의 방법으로 A작가와 비슷한 작품을 만들어 전시했다면 어떤가? 이때도 사안에 대해 나이브하다는 비판이 가능한가? 범인은 이미지 그 자체가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작품으로 다루고자 결심한 순간부터 피해자의 현실을 고려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피해자의 현실과 관계 맺기에 실패한 작품은 윤리적인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때 작품은 현재 피해자의 고통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방향을 향해 위치해야 한다. 또 피해자 중심주의로 생각하자면, 세월호 작품이 피해자의 아픈 기억을 상기시키는 2차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시기 상조가 아닌가 생각한다. 사건이 일단락된 상황에서는 그런 비판이 가능하다.


하지만 세월호는 여전히 미해결 사건이고, 유가족은 정확한 진상 규명을 통해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자 투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일권 감독의 <세월호>는 그 역방향을 향해 달리고 있으며, A작가의 작품은 현시점에서 뭘 말하려는지 스탠스가 애매했다. 오일권 감독의 세월호 포스터는 명백한 재난 포르노다. 하지만 B평론가의 확언처럼 나는 A작가의 작품이 포르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시기의 문제였을 뿐이다.


피해자 중심주의에서 피해자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도 있다. 뭉뚱그려 '피해자'라고 지칭하지만 피해자는 단일하지 않다. 유가족? 생존자? 그 지인들? 혹은 중계된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모든 사람도 역시 마음속에 상흔을 지닌 간접적 피해자가 아닌가. 참사와 가장 관계된 유가족이나 생존자도 공동 성명을 내고 있긴 하지만, 그들 모두는 하나의 단일한 인격체가 아니며 세월호 작품에 반응하는 태도도 모두 다를 것이다. 어떤 피해자는 A작가의 작품을 보며 강력하게 항의할 수도 있고, 어떤 피해자는 절실한 위로를 받을 수도 있으리라. 작품의 윤리적 성공과 실패는 '어떤' 피해자가 결정하는 것일까?



결국 창작자가 감내해야 할 몫



내 생각의 경로는 '피해자가 작품의 윤리를 결정한다' 까지 전개가 되어버렸다. 이런 고민을 SNS에 털어놓았다가, 지인의 댓글 한마디에 바로 반성했다. 윤리의 잣대는 그 누구도 결정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창작자 본인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또 창작자는 비판의 칼날이 들어왔을 때에도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반성하고 고민해야 할 주체다. 매번 실패하고 또 혹독한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대상에 진정으로 다가가려고 하는 것, 그것이 창작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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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l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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