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고양이들

어제 글에서 @jamieinthedark 님께서, kr-pet 태그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셨기에, 오랜만에 고양이들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오늘 이야기할 고양이들은 사실 내 블로그에 두 번 정도 등장을 했었다. 하나는 사진에 관한 잡담, 또 하나는 흑백사진 챌린지에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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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2013. , iPhone4

고양이들이 처음 태어난 때는 11월,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원래 직장에서 자주 기어들어오는 어미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는데, 어느날 살펴보니 배가 불룩한 것이 출산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계단 아랫목에서 누워 출산을 준비하는 고양이를 볼 수 있었고, 과장님을 비롯한 많은 직원들이 출산을 돕기 위해 이불도 깔아주고 가림막도 쳐주었던 기억이 난다.

고양이는 총 세 녀석이 태어났는데, 그 중에 한 녀석은 직원이 키운다고 데려갔다. (하지만 그 직원은 애초에 키울 목적이 아니었고, 데리고 장난을 칠 목적이었다. 결국 어딘가에 던져져서 죽고 말았다고 한다.) 나머지 두 마리는 위 사진과 같이, 치즈 태비와 고등어 태비의 남매였고, 이렇게 두 녀석은 직장 바로 옆 건물의 버려진 창고를 서식지로 삼았다. 어차피 활용되지 않았던 공간이라, 사료와 고양이들 장난감을 사두곤 했다. 이 녀석들 중에 치즈 태비는 거의 개냥이라고 할 정도로, 사람과 가까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들이대며 부비곤 했다. 고등어 태비는 새침한 녀석이었는데, 멀찍이 떨어져 있는척을 하다가 관심을 꺼버리는 듯 하면 가까이와서 아양을 떠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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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013. iPhone 4

요 두 녀석들은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았거니와, 장난을 치기도 많이 쳤다. 애초에 사람에 둘러 쌓여 태어났으니, 스스로를 사람처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사무실을 제 집 안방 드나들듯이 다니기도 했는데, 이를 막기 위해 문을 닫아놓기도 했다. 물론 문을 닫아놓으면, 집사들 보고 문을 빨리 열라는 듯이 울음 소리를 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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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2013. iPhone 4

이 녀석들은 한가로운 오후에 낮잠을 즐기기도 했는데, 문제는 사람이 나다니는 곳을 그리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직장에 체육시설 비슷한 게 있었는데, 새벽에 둘이서 탁구를 치다가 당직 직원에게 걸렸다고 한다. (...) 사실 좋아하는 직원들도 많았으나, 직장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그리 달갑지는 않았을터, 결국 이 두 녀석들은 차를 타고 멀리멀리 야산에 방생이 된다. 말이 방생이지, 애초에 사람 손을 탄 고양이가 얼마나 적응했을지는 사실 잘 알 수 없다. 당연히 이 녀석들의 생사는 불명이다.


이 녀석들의 이름을 선뜻 지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노랑이, 까망이라 불리기도 하고, 누런 고양이, 까만 고양이로 불리기도 했다. 사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세계에 생(生)을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짓는다는 것에는 책임이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아무도 책임을 지려하는 사람이 없었다. 애초에 직장은 집이나 가족과는 거리가 먼 공간이므로, 선뜻 직장을 집으로 살고 있는 고양이들에게 일말의 관심을 보일지언정, 책임 같은 것은 누구도 지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글을 적고 있는 나 또한, 벗어날 수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양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소극적 방조/방임이 결국 적극적 회피와 (책임에 있어서) 동등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 사실 이 문제는 소극적 행위가 적극적 행위에 비해 윤리적으로 책임으로부터 경감될 것이냐 라는 전통적인 윤리 이슈와 맞물려 있기도 하다. 물론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

이 녀석들이 떠나고 나서, 사실 무척 마음이 좋지 않았다. 허전한 것은 둘째 치고라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과 왜 다양한 방법들을 고려하지 못했나와 같은 자책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해서, 그냥 그 녀석들 잘 살고 있겠지 - 하며 대충 잊어버리곤 하는데, 그래도 마음 한 켠엔 항상 짐으로 남아있다.


나는 반려 동물의 일상을 공유하고 가까이서 지켜본다는 것에 대해,서도 그만큼의 책임과 진지함이 따라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예전에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고, 무지개 다리를 건너가는 것까지 지켜보았었지만, 그 때엔 실제로 내 소속인 상태에서 키우던 것이었다. 이 녀석들은 사실 자신들의 소속을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정한 셈이 되었는데, (정확히 이야기하면 어미 고양이가 정한 걸 수도 있다.) 내 소속이 아니라는 이유로 애매한 방관을 했던 것이다. 나는 철저히 방관을 했거나, 혹은 철저한 개입을 했으면 어땠을까 상상하곤 한다. 적절한 거리에도, 적절한 책임이 따를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때는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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