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3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1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2

-- 모든 안티로맨틱 성향인 자들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는 친구와 이성의 경계가 굉장히 분명하다고 얘기한 바 있다. 애초에 조금이라도 이성으로 보이면 친구로 시작하려 들지 않고, 친구로 정한 상대가 그 선을 넘으려는 시도를 하면 항상 관계의 단절로 끝난다. 왕후 장상의 씨는 따로 없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친구와 연인은 아예 다른 종자이다.

-- 연인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보다는, 로맨스가 배제된 친구로 어떤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해봤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에 드는 상대는 그냥 딱 보면 아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는데다가, (고작) 그런 방식으로 호감이 가는 것이라서 꼭 그 사람과 연인 사이가 되지 않아도 별 상관이 없다. 반면 친구는 찾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을 요하는 상대이다.

-- 성향이라는 것을 소위 트라우마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분명 어떤 계기들이 쌓여서 내 다소 비뚤어진 이성관(및 우정관)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뚜렷하게 기억나는 사건이 하나 있다. 이제 와서 방구석 미투 운동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그리고 할 마음도 없지만) 당시에는 꽤나 충격이었다.

-- 언어권도, 지인의 풀도 이제는 겹치지 않는 입장에서, 굳이 익명으로 그 친구를 지켜줄 필요는 없어 보인다. 조너던은 내가 중-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같은 반이 되어서 만난 애였다. 우리 학교가 있는 동네도 쾌적한 편이었지만, 그 애는 유독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더더욱 좋은 동네 거주민이었다. 아버지는 주치의로 잘 나가는 의사였다.

-- 조너던은 새로 진학한 학교에서 확실히 대학, 그것도 좋은 대학에 진학할 생각도 있고 가능성도 있는 소수의 아이들 중 하나였다. 나나 걔나 학교에서 "잘 나가는 것"에 중독된 상태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느끼고 있었다. 중-고등학교라는 사춘기의 정글에서 벗어나게 되면, 둘이 아마도 같은 대학, 어쩌면 같은 학과까지도 선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겉의 허세와는 별개로, 순간 다른 애들이 유치하거나 피곤하게 느껴질 때마다 서로 눈빛을 주고 받을 정도의 감정은 공유하고 있었다.

-- 그 애가 내 우정관, 연애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중-고등학교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그런 동질감에서 오는 우정과 이성으로서의 호감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내 추측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친구와 이성 간의 선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고 열어놓다가 발전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하여간 지금의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

-- 우정과 호감이 구분되지 않은 그 상태. 어떻게 보면 그것이 정상적일반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지금의 내 눈으로 보면 그것은 그냥 혼란이자, 분석이 부족한 결과일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정제되지 않은 감정은 감정만으로 그치지 못했다. 실제로 중-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우리는 잠시 사귀었기 때문이다. 물론 금방 헤어지기도 했다. 사귄 이유는 "괜찮아 보이고," "다른 애들이 어울린다고 부추겨서" 정도? 어쨌든 명색은 첫 남자친구인 셈이다. 헤어진 이유는 그 나이에는 항상 그렇듯이 사소한 오해와 질투, 자존심? 생각보다 헤어진 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점에 스스로 놀랐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나는 얘를 정말 친구로만 두고 싶구나.그래서 나름 코드가 맞는 친한 친구로 지냈다.

-- 걔는 입학할 당시에 키만 컸지 '소년'이었던 반면, 나는 중-고등학교에 입학할 당시에 이미 신체적 성장은 끝난 상태였다. (지금 내 키가 166.5cm인데, 한국 나이로 초등학교 4학년 때의 키 그대로이다.) 일반적으로 서양 남자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체격도 크고 그래서 의외일 수 있는데, 어릴 때는 성장이 더딘 경우가 상당히 많다. 사춘기를 거치면서는 특히 얼굴이 많이 바뀐다. 뽀얗고 이목구비도 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위화감 들지 않게 생겼다가, 자라면서 소위 T존이라고 하는 안와상융기와 코가 발달하면서 완전히 다른 느낌의 얼굴이 된다. (그런데 20대의 얼굴도 최종이 아닌 경우가 많다. 성인의 얼굴이 노화하는 게 아니라 제 3의 얼굴이 있는 듯한...) 아무튼 걔는 성장한 후에도 꽤 괜찮았다. 마의 사춘기였는데도 얼굴이 하얗고 깨끗했고 단정한 느낌에다가 키도 많이 컸다. 새삼, 이성으로 보이지 않은 이유를 잘 모르겠다. 좋아하는 타입 따위에 대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 거의 성인 나이가 된 상급생 두어 명에 대한 동경의 시기가 잠깐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관심을 보이면 무서워서 도망가곤 했다. 그냥 두근두근한 것까지만 느끼고 싶었다. 한국에서 자란 친구들 이야길 들으면 선생님을 짝사랑하거나 그런 일도 많다는데 나는 전혀. 엄청 잘생긴 선생도 한 명 있었는데 전혀. 이런 일은 있었다. 한 30대 초반의 수학 선생이랑 같은 스포츠 팀을 좋아했는데, 어느 날 선생이 기념품을 사다준 적이 있었다. 조너던은 그 선생이 내게 감정이 있다고 확신했고 다른 애들도 놀리긴 했는데, 보통 그렇게 부추기면 헛 감정이 들법도 한데 아무런 동요도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보면, 쉽게 설레이는 성향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만 13-14세였다.

-- 그러다가 갑자기 완전히 빠져버리게 된 동급생이 한 명 생겼다. 운동을 잘하는 애들이 나머지 아이들의 팬심을 자극하던 시기였다. 내가 좋아하게 된 폴이라는 애는 농구를 했다. 아무래도 나는 뭔가 딱 마음에 드는 곳이 생겨야 관심을 갖는 것 같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마음에 든 부위로 축약시켜서 보는 못된 버릇이 언제부터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걔의 경우는 뒤통수, 정확히는 뒤통수에 착 붙은 머리카락의 색상과 모양에 꽂혔다. 나한텐 굉장히 드문 일인데, 머리를 만져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상대가 이성으로 보이는지를 판가름할 중요한 기준이다.

-- 이 폴이라는 애가 전에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 사귀다가 헤어졌다가를 반복한 남자 친구다. 서로 할 말은 별로 없는데 눈 마주치면 그냥 웃음만 나는 그런,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관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그건 보다 나중에, 한국에서의 일이다.)

-- 폴은 질투 등의 이유로 내게 화가 나면, 린지라는 여자애를 만나곤 했다. 그러고 (거의 하루 이틀 만에) 나랑 화해하면, 린지를 차고 다시 돌아왔다. 그때마다 린지와 그의 관계는 주변 아이들에 의해 리바운드라고 불렸고, 따라서 나는 린지한테 화가 날 겨를이 없었다. 린지랑 사귄다고 할 때마다 폴은 적어도 내가 시야에 들어오면 엄청 불행해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하는데 어떻게 불안해 할 수가 있었겠는가. 당연한 얘기겠지만 린지의 친한 여자 친구들은 나를 엄청 싫어했다. 린지는 머리도 짙은 밤색에 얼굴도 눈도 동그란 애였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간혹 비슷하게 생긴 여자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흠칫 놀라면서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 10대의 사랑이란 부모님과 친구들로 충족되지 않는, 미숙한 한 인간의 공허함을 모두 꽉 채울 수 있는 그런 감정이다. 아마 나는 폴을 사랑한 것은 아닐 것이다. 뭔가 사춘기 특유의 넘치는 감정을 쏟을 곳이 생긴 기분, 결국 호르몬 작용 정도로 설명이 되겠지. 그러나 만약 돈으로 다시 그런 감정을 살 수 있다면. 나는 얼마까지 지불할 용의가 있을까. (사실 지금도 로맨스 극초반에는 충분히 가능한 감정인 것을 아니까, 아마도 그다지 많이 지불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 여하튼 아마 그때쯤부터, 조너던처럼 코드가 맞는 상대와 이성으로 느껴지는 상대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폴과 조너던은 서로 나쁘지 않은, 다소 먼 친구 관계였는데, 폴은 나와 조너던이 같은 성적대의 반에 속해서 거의 종일 얼굴을 보는 사이라는 점에 대해 약간 신경은 쓰였던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는 곳에서는) 조너던을 굉장히 너그럽고 여유롭게 대하는 편이었다. 그 여유에서, '어차피 내가 승자'라는 메시지가 있는듯한 느낌도 가끔 받곤 했다.

-- 문제는 조너던이 본격적으로 '청년'의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일어났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데, 조너던이 천천히 자전거를 몰고 와서 페이스를 맞췄다. 그러고는 속도를 내서 가버리기 전에, 내게 한 마디 했다. "너 입고 있는 티 있잖아, 내 침실 바닥에 널려 있으면 엄청 예쁠 것 같아."

-- 사실 아무리 애가 키가 크고 얼굴이 변했다 하더라도, 내 눈에 이성으로 보이지 않으니까 딱히 남자라고 인식을 하지도 않고 있었고, 그래서 여전히 "어린애"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도 어린애였다. 많이 놀라기도 했는데, 사실 울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울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배신감이랄까, 그런 것이 들었다. (아마 밤 10시 이후의 스탠드업 코미디에서 건진 대사가 아닐까 싶은) 그 말 자체보다는, 내가 전혀 이성으로 안 보는데다가 어느 정도의 우정도 느끼고 있는 친구라는 애가 나한테 그런 생각을 장난으로라도 한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 그 전에 이미, 대놓고 짖궂은 성격인 애들한테서 칭찬을 빙자한 더 심한 말을 안 들어본 것도 아니었다. 그 또래 남자애들이 장난처럼 더러 할 정도의 말이었으니까. (보통 직장 등에서 서구가 우리보다 훨씬 성희롱에 엄격하리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은데, 그건 규칙이 느슨할 경우 엄청나게 강도가 센 언행들이 오갈 수 있는 본성을 그들 스스로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나도 그 애들보다는 성숙했다지만 어쨌든 사춘기였다. 걔네가 말로 표현하는 건 짜증났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는 싫지 않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의사에 맞춰줘야 한다거나, 억지로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닌 이상 별로 기분 나쁠 것은 없었으니까. 만지지만 않는다면, 보는 건 상관 없어, 정도? 요즘은 한창 성장기에 이런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도 무슨 의식이 부족한 결과로 보일 수도 있겠다만, 그게 내가 기억하는 당시의 솔직한 속내이다.

--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사춘기란 "관종"기와 노출증이 가장 극대화되는 시기가 아닐까. 마치 무대 위에 올라간 무희처럼, 안 봐주면 슬플 존재. 그렇다고 그 이상으로 침해받고 싶지는 않은, 뭐 그런...대가의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그런 느낌이 보이는 그림을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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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간, 결국 조너던이 한 말 자체가 감당이 안 됐다기보다는 평소에 친구로 느끼던 애였기 때문에 충격이었던 것이다.

--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듣는 성적인 말이 성희롱인 경우는 남녀를 떠나서 매우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는, 실제로 욕구 충족이 안 되고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본능일 것이다. 물론 사회는 듣는 사람의 의사와 상관 없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금지한다. 실질적인 불이익을 줄 수 있느냐를 떠나서,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불이익을 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하는가? 그것은 물론 개인이 결정할 문제이다. 그러나 실제로 감정이 상한 만큼보다 더 큰 분노를 느껴야 하는 부담 역시 지워져서는 안 된다. 침묵하라는 것이나 분노하라는 것이나, 당사자가 자연스레 원치 않는다면 동일한 강요이기 때문이다.

-- 당시에 나는 놀라긴 했지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일단 가졌다. 걔는 자라서 이제 다른 사람인데, 적어도 내가 생각지 않았던 부분이 있는 사람인데, 나는 걔에 대한 태도를 달리 해야 하는가. 가령 피한다거나, 친구로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거나. 뭐 그런 생각들.

-- 한참 시간이 흘러서야 엄마한테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을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우리 엄마는 내게도 잘못이 있다거나 빌미를 줬다거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분이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고 해도,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또한 내가 실제로 느끼지도 않는 분노를 느껴야 한다거나, 그 일로 문제를 삼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서 왠지 해야만 할 것 같아서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거나 하는 부담이 내게 지워지지도 않았다. 말하는 것을 통해, 내가 실제로 느낀 충격의 잔재를 없애는 효과는 있었다.

-- 그리고 나는 결정을 내렸다. 조너던을 여전히 친구로 두고 싶었다.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애가 그런 소리를 또 하거나, 이성으로 봐달라는 진심이 섞여 있다고 느껴진다면, 나는 너한테 그런 관심이 없다고 확실히 표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꼭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확실하게 눈치를 줄 방법은 많았으니까. 설령 표현하지 않더라도 내가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물론 없지만, 그게 서로의 의도와 기대치를 이해하기 위한 확실한 방법일 것이니까.

-- 지금도 그런 경우에 대한 내 "정책"은 비슷하다. 물론 뭘 잘 모르고 욕구가 넘쳐나는 사춘기 아이의 성희롱적인 발언과 진심으로 날 아끼는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는 친구의 감정 표현을 동일선상에 놓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포장"이 다를 뿐이다.

--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욕구를 느끼는데 충족이 안 될 경우, 온갖 앞뒤 안 맞고 쓰레기 같은 말이 다 튀어나올 수 있다고. 꼭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얘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말이라는 것이 사회 기준으로 성희롱적인 것일 수도 있는 거고, 나름대로 아름다운 고백일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결국 뿌리는 같은 것 아닌가. (물론 일방적으로 "권력"이 있는 사람이 "단지 그렇게 할 수 있어서" 하는 말들, 또는 자신과 아무 관계도 아닌 사람에 대한 뜬금 없는 거부의 뜻으로 하는 표현들은 그 자체로 화자에게 재미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좀 다르게 본다.)

-- 조너던과 나는 수직관계도 아니었고, 어떤 강요가 가능해서 내가 끽소리도 못하는 그런 사이도 아니었다. 심지어 내 입장에서 남자친구와 그 친구들한테 이르면, 보복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앞으로 살면서 그냥 친구 위치에 두고 싶은 사람이 "반항"을 할 가능성은 계속 있으리라고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그런 일로 화가 날 수도 있겠지만, 아닐 때는 아닌 것이기에, 보복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 대신 친구에게서 받고 싶지 않은 느낌이 뭔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또한 (이성으로 보지 않는 것 자체를 못 견뎌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가급적이면 친해지기 이전부터 자존심을 꺾지 않는 방법으로 내 의도를 확실하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일단은 친구로 시작"할 수도 있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네가 이성으로 안 보이는데다가 대화가 즐거우니까 친구를 하자"는 의도를 갖기 때문에.

-- 그렇게 나는 연애에 대한 관심 이상으로, 성별이 다른 이성애자 친구가 내게 갖는 의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정을 지키는 것이 연애보다 어려웠기 때문에, 결국 연애에 대해서도 빨리 냉정을 찾는 성향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보다 나중에는, 성욕 이상으로 로맨스가 친구 사이에서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점차 알아가게 된다. (물론 이 수기를 꼭 시간순으로 쓸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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