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1

-- 본디 로맨스란 스토리를 뜻한다. 라틴어가 일명 통속 라틴어(vulgar Latin)로, 또 로망스 계통 언어들로 완전한 탈바꿈을 하면서, 로망스어로 된 이야기는 통칭 로망스 즉 로맨스라고 불렸다. 대충 중세를 배경으로 리라 하나 들고 노래하듯 이야기하듯 하던 시인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서사시가 형식이라면 로맨스는 성격이자 본질이다. 로맨스는 주로 기사의 이야기였다. 기사다 보니 기사도가 있고, 훗날 시대착오(anachronism)의 대명사가 된 돈키호테가 그랬듯이 섬기는 여인이 있었을 것이다. 아서 왕의 기사 란셀럿처럼 왕의 아내를 사랑했다거나 하는 그런 답답한 스토리들 말이다. 영웅의 기질이 있는 자들이 고작 그런 스토리에 얽혀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 비극의 싸대기를 후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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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서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라틴어로 된 것도 아니면서 로맨틱하지도 않은 스토리가 있다. 로마 시대부터 얼굴에 야만적인 칠을 하고 사납기로 유명했던 브리튼 고유의 이야기 베오울프가 그런 예시이다. 그러나 베오울프를 쓰는데 사용된 언어는 게르만 계통 언어의 영향이 더 컸을 당시의 옛 영어(Old English)이다. 그런 거친 영웅들의 이야기는 결국 로망스어/로맨스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다시 말해 로망스(어)와 로맨스(스토리), 그리고 로맨스(사랑)은 다 짬뽕이 되어 있다. 세 번째의 경우 앞의 둘의 영향으로 인해 탄생한 개념이지만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로맨스는 곧 이 세 번째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 제목의 안티로맨틱도 세 번째 의미의 로맨스에 대한 거부이다.

-- 로맨스라는 용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자면, 19세기의 낭만주의와도 결부되어 있지만 romanticist, romanticism 등의, '있는 척' 하는 편리한 용어들이 별도로 있기 때문에, 보통 말하는 로맨스와 별로 혼동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안티로맨틱이라고 하면, 낭만주의에 반기를 든 모더니스트들의 특징을 일컫는데 사용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혼란이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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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느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좋아한다. 어쩌면 인류 최초이자 최고의 언더독 스토리, 진정한 B급 감성의 안티히어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써놓고는 순간 깡디드를 떠올리기는 했지만, 언젠가 설명할 연유들로 인해서 제외해도 될 것 같다. 물론 그런 연유로, 지하생활자는 최고의 안티로맨스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안티로맨스란 두 가지의 의미에 다 해당된다. 로맨틱하지 않은 이야기, 통상적인 로맨스(스토리)를 뒤집은 이야기. 정작 나는 학창 시절에 별로 B급 감성을 누리지 못해서 이런 소설로 대리만족을 하곤 했다.

-- 에이로맨틱(aromantic)이라는 용어가 국내에서도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전부터 무성애자(asexual)란 용어가 가끔 인터넷 댓글 등에 등장한 걸로 미루어 보아, 시간 문제였다. 그딴 반짝 뜨는 용어로 정의될까봐 괜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 서머셋 몸 가라사대, 욕망은 슬픈 것이라고 했다. 동감하면서, 로맨스에 대한 욕구야말로 슬픈 것이 아닐까 싶을 때가 많다. 이 둘이 없었다면 인간은 엄청나게 더 발전했을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러나 진짜로 둘 다 없었다면 아마도 일찍이 멸종되었을 테지. 이것이 슬프지 않으면 뭐가 슬픈지.

-- 어차피 나는 에이로맨틱보다는 안티로맨틱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못 느끼는 것 같지만, 못 느낀다는 것은 마치 무슨 기능의 결여나 고장 같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 못하다. 마치 "나를 애꾸라고 부르는 것은 상관없어. 사실이니까. 그러나 나를 애꾸라고 놀리는 것은 참을 수 없다"의 느낌? 안티로맨틱은 에이로맨틱보다는 더 능동적으로 들린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고 평소에 안티로맨틱이라고 불리고 싶은 것도 아니다. 안티로맨틱 역시, 필요에 의한 이 수기를 쓰기 위한 편의상의 명칭일 뿐.

-- 안티로맨틱은 이상주의자이기도 하다. 사랑의 시작은 좋아한다. 재미있는 이야기의 도입부를 좋아하는 것과 같다. 로맨스를 스토리로 보고 접근하는 것이다. 한 발짝 물러서서 관조할 여유를 반드시 남겨 두기 때문에 스토리로 볼 수 있다. 또한 매번 비슷한 스토리는 싫기 때문에, 계속해서 다른 플롯을 요구한다. 물론 어떤 플롯이건 간에 시작되면 끝난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잘 시작하지도 않게 된다. 이렇게 말하면 상처를 두려워하는 줄 아는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로맨스로 인한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애초에 안티로맨틱이 아니다.

-- 안티로맨틱은 흔히 얘기하는 Commitment (전념, 헌신하는 관계) 에 대한 두려움도 기본 옵션으로 장착하고는 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헌신을 싫어하는 사람은 생각 이상으로 많다. 한국 사회에서는 주입과 훈련을 통해 그것을 억누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위로해

-- 안티로맨틱은 아마도 시니컬한 경우가 많겠지만 그냥 무관심할 수도 있다. 소시오패스 성향도 안티로맨틱과 교집합을 이루고 있을거라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소시오패스적이기도 하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몰라서 이 수기도 쓰는 것이다. 물론 상관도 없다. 모두가 공감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솔직히 말해서 요구되는 것에 비해 공감을 안 하고 있다는 이야기 역시, 공감을 얻을만한 이야기이다.

-- 이건 조금 빗나간 이야기다. 어차피 남에 대한 진정한 공감이나 정의감 같은거 없어도, 자존심으로 "불의"를 행하지 않고 살 수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자존심이 싫어하는 행위다. 내 생각에는 자존심이 정의감보다 훨씬 더 강력한 억제력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정의감에 넘치기보다는 자존심이 강했으면 좋겠지만...

-- 정말 말도 안 되게 감상(not 감성)적인 영화들을 내리 보고 있는 나날들이다. 나는 그 문제를 이렇게 진단한다. 나는 지난 일 년 간 저탄수화물 식단을 고수해왔는데, 한 달에 한 주 정도는 탄수화물 폭탄을 마구 섭취한다. 아마도 여자라서 불가피하게 갖는 주기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매우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하는 초콜렛을 먹으라는 자연의 소리가 있다고나 할까. 분석 따위 필요 없는 유치한 로맨스 영화들을 보고 싶은 것은 이와 비슷하다. 필요에 의한 섭취란 사실상 필요에 의한 방출이나 마찬가지다. 분명히 먹고는 있는데, 먹는다기보다는 배설하는 느낌. 먹는 내내 찝찝함이 감돈다. 그래서 이 시기가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 본다고 해서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 대한 이입의 문제는 얼마 전에도 기록한 바 있다. 내 경우는 메타 영화에 좀 취약한데, 영화가 영화 밖으로 나와서 나와 함께 영화를 봐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영화에 낚이는 순간에도 나름의 분석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감상적인 노래들을 분리해내서, 가사와 곡조의 뼈대를 따로 따로 발라낸다. 배우를 분리해낸다. 역할을 분리해낸다. 비록 별다른 머리 쓰는 분석까지는 필요 없을지 몰라도, 종이 인형을 잘라서 색칠하고 놀듯이 그렇게 논다. 왜냐고? 궁금하니까.

--못 느끼는 것에 대한 상실이나 결핍의 감정이 혹시나 쌓였다면, 그것을 연기하는 종이 인형들을 보면서 가끔은 울어도 된다. 그런다고 해서 그것들이 나를 바꿔놓지는 않는다. 종이 인형들은 나를 위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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