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i. #1. 피, 퀸과 보위, 얼음아기, 나 그리고 나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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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혈액형

굳이 새로 사람들을 만나려 하지 않는 편인데다가 집에서 일한다지만, 그래도 사람을 새로 만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연령대나 관심사, 배경이 전혀 비슷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친구같이 얘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내가 첫 인상이 차가운 반면 그 뒤에 이어지는 언행이 상대적으로 많이 털털하다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인상이야말로 진리인 법. 괜히 친해진 줄 알고 오버하는 사람들을 내치는 일이 자주 있다.

어쨌든 새로 알게 되는 사람들이 듣고 '의외'라며 약간의 놀라움을 표시하는 사항이 (당장 생각나는 걸로는)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지금 컨셉을 잡고 있는 중인 또.하.나.의. 글 시리즈의 서문에 밝힐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내 혈액형이 A형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나는 그에 따른 스테레오 타이핑 자체에 관심도 없고 믿지도 않기 때문에 아무 의미 없는데, 상대방이 의외라는 식의 반응을 안 보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어쨌든 많은 이들에 의하면 A형은 소심하다고 알려져 있고, 사람들이 의외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뭔가 남들이 말하기 껄끄러워 하는 말, 또는 생각지는 않았지만 막상 들었을 때 '뜨아'해하는 말을 곧잘 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돌직구 전문인 것은 아니다. 직설적인 말은 그냥 해야 하는 상황이거나 할만 하니까 하는거고, 빙빙 돌려서 전달해야 하는 경우를 더 즐기는 편이다. 후자에는 뭔가 창의력을 발휘할 여지가 있지 않은가. 내가 던져본 돌직구의 좋은 예는 언젠가 다른 글에서 한번 들어보도록 한다.

2. 노래 하나 듣고 가자. 퀸, 데이빗 보위, 그리고 ??? ???를 둘러싼 저작권 문제

유명 그룹 퀸, 유명 가수 데이빗 보위의 콜라보레이션 곡: Under Pressure (1981)

그리고 누가 들어도 이 곡을 샘플링한 것이 자명한 또 하나의 노래가 있다. 1989? 또는 1990년도에 발매되어 90년대의 시작을 강타폭행한 백인 랩퍼 바닐라 아이스의 곡. 아마 지금 40대 정도에 접어든 형들은 다 기억할 것이다.

랩퍼 바닐라 아이스의 '아이스, 아이스, 베이비"

그렇다면, 이 어마무시하게 팔린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스..."는 퀸/데이빗 보위의 곡 베이스라인(딩딩딩디디 딩딩)을 샘플링함에 따른 로열티를 지불하거나, 하고 있을까?

참 재미있게도(?) 바닐라 아이스는 자신의 노래가 Under Pressure와 같은 베이스라인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부인해왔다. 퀸/데이빗 보위 곡을 잘 들으면 딩딩딩디디 딩딩!인 반면, 자신의 곡은 딩딩딩디디 딩딩,이라는 것이다. 이 개소리는 바닐라 아이스 본인의 말을 통해야 더 빨리 이해 가능하다. 평소에 영어가 안 들려도 이해 가능.

무려 2017년에 와서야 바닐라 아이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과거의 변명이 바보 같았다고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퀸과 데이빗 보위에게 당한 소송에 드는 비용보다 더 저렴한 방법을 찾았고, 그 방법은 바로 Under Pressure의 저작권을 사들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말조차 거짓말이 아니라면, 퀸과 데이빗 보위의 Under Pressure 저작권은 바닐라 아이스의 것이다. 그리고 별도로 소송은 진행되었기에, 퀸과 데이빗 보위는 무려 바닐라 아이스의 '아이스, 아이스...'의 작곡자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이겼다고 과연 말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베이스라인을 떠나, '아이스, 아이스...' 자체가 다른 사람에 의해 쓰여졌다는 설이 돌았고, 그것은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였다고 추측이 된다. 왜냐하면 투팍 등으로 유명했던 레이블 Death Row Records 의 당시 CEO 슈그 나이트(Suge Knight. 애칭 sugar bear에서 따온 이름이라고...)가 바닐라 아이스를 찾아가서 두들겨 팼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팼다기보다는 발을 잡고 호텔 발코니 바깥에 매달리게 했다고 하는데, 일단 이름을 검색하면 나오는 슈그 나이트의 피지컬(?)을 봤을 때 가능한 일로 보인다. 참고로 바닐라 아이스는 이 모든 루머를 부인하며, 나이트가 찾아온 그날, 자신에게 상당히 잘해주었다고 말한 바 있다(...).

3. Jamie/Jaime

내 스팀잇 네임인 제이미의 철자는 Jamie인데, '왕좌의 게임'의 제이미(얘는 Jaime)라는 캐릭터 이름과의 연관성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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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뿌리는 같지만 언어적으로(?) 다소 까다로운 사람의 입장에선 전혀 느낌이 다른 이름이다. 내 눈에는 준석이와 춘식이 간의 느낌 차이에 육박하는 차이가 보인다.

Jamie, Jaime 두 이름 모두 히브리 이름 Ya`aqob(야콥)에서 나왔다. 성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야콥 또는 야곱은 예전에 깨알 같은 문학 2에서 잠깐 거론한 적이 있는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야콥이라는 이름은 라틴어에서 야코부스(Iacobus) 또는 야코무스(Iacomus)로 살아남았고, 사실상 이 둘은 같은 이름이나, 야코부스는 영어 이름 제이콥(Jacob)에, 야코무스는 제임스(James)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내가 택한 철자 Jamie는 제임스의 중성적인 애칭 철자인데, 물론 애초부터 제임스가 아닌 제이미로 이름을 짓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그런데 사용된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다. 가령 제임스 1세가 영국을 다스리던 시절에 여자 아이(또는 남자 아이) 이름을 제이미Jamie로 지은 경우는 아마 없었으리라 생각되는데, 실제로 Jamie라는 철자로 이름을 지은 유명인들의 사례는 1980년대부터 드러난다. 유명인을 기준으로 일반인들을 다 가늠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Jamie는 제임스를 애칭으로 또는 여성적인 이름으로 바꾼 결과이고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네이밍이라 할 수 있다.

반면 Jaime는 스페인, 포르투갈 및 남미권에서 '하이메'라고 발음되는, 거의 전적으로 남성적인 이름이다. 제이미Jaime는 제임스의 애칭으로서가 아니라 별개로도 존재해왔다. (물론 Jamie도 제임스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는 이름이지만, 비교적 최근에 국한된 경우이다.) 따라서 중세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Jamie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인 반면, Jaime는 어울린다. 이상.

사실 무엇이 중요한 정보이고 무엇이 아닌지는 그 정보를 보는 이와 나의 관계, 또는 보는 이가 부여하는 의미에 달려 있다. 물론 나 자신에게는 모든 정보가 다 중요하다. 자신애 대한 내용이라면 더 이상 정보가 아니라 나 자신을 구성하는 것들이니까.

나는 사춘기 때부터, 육신과 생활의 편안함이란 정신에 마땅히 따라야 할 고통에 빚져가면서 얻은 결과라고 생각해왔다. 완벽한 진실에는 단 하나도 접근할 수 없고, 타인도 절대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불쌍한 존재인데 대체 왜 살아가는가에 대한 불편함, 그리고 그 불편함 따위는 잊어버리게 해줄 수 있는 편안하고 달콤한 생활 사이의 갈등을 말한다.

결국 내가 그 결론으로 얻은 태도는 '자조'인데, 이름과는 달리 무한정한 시니컬함이 아니다. 현재로서는, 내 신조인 '자조'를 '정신으로 많은 일을 할 수도 있고 가끔은 약간씩 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얄량한 기쁨들과 만족감에 묻혀 살아가는 자신을 귀엽게 여기는 태도'라고 규정하고 싶다. 이 태도로 꽤나 많은 지식과 문화를 즐기면서도 우울함을 맛보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자조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다. 자조가 내 삶의 반을 이룬다면, 나머지 반은 아예 다른 세계이다. 이 부분은 평소에는 글이나 말로 표현하지 않는데, 아주 부분적이나마 다른 종류의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오늘도 @stylegold님의 오마주 프로젝트에 끼워넣기 위해, t.m.i.의 일환인 것 같으면서도 아니게 마련인 '일기'형식의 글을 하나 꺼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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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나 혼자 산다

물이 깨끗한 곳으로 이사를 왔지만, 끓여 마신다. 공기가 나쁠 땐 창을 열지 않아도 되도록 생수를 잔뜩 주문한다. 또 요거트 만들 우유, 고양이 모래와 사료, 고기, 야채, 치즈, 피칸을 인터넷으로 주문한다. 기록하기 뭐한 것들을 제외하면 이 정도가 내 생필품이다.

공기 좋은 날은 계란을 사러 40분쯤 걸어서 백화점에 딸린 대형 마트에 간다. 나름 먼 곳이기 때문에, 아무리 장보러 가는 거라지만 예쁜 운동화를 신고 간다. 옷이나 신발은 매장서 걸쳐보고, 역시 인터넷으로 산다.

쇼핑을 하는 대신, 피부나 머리 손질을 위해 가는 곳은 없다. 고양이들 때문에 손톱에 뭘 바를 일도 없고, 화장도 안 한다. 검소해서라기보다는 끈적거리는 제품, 그리고 남의 손이 머리나 얼굴에 닿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가끔 같은 여자가 친근감의 표시로 팔짱을 껴도 기절초풍한다. 티가 날는지는 모르겠다. 요즘은 새 친구를 굳이 만들려들지 않으니까.

원래는 서너 명쯤 초대해서 요리를 해 먹이는 것을 좋아했었다. 나는 누구에게서나 재미있는 면을 잘 찾아낸다. 타인은 내 간접 경험이니까. 그런데 요즘은 쉽게 거리를 좁혀주고 싶지 않다. 아주 가까운 사이는 원래도 싫어했고, 아예 멀리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적당한 거리를 기꺼이 유지하려는 사람은 잘 없다. 혼자 빠져들고 혼자 미워하는 사람이 더 많은지도.

혼자 살기엔 넓은 내 집엔, 비록 오래 전이지만 나름 고급 주택으로 지어진 느낌이 아직 남아있고, 거실 창은 지금 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풍경을 담고 있다. 집에서 편하게 일하는 나는 그저, 이곳에서 살고 싶어서 서울에서 온 사람이다.

고양이가 아홉 마리나 되지만, 집 안에 갈 곳이 많다보니 한꺼번에 다 보긴 힘들다. 고양이는 원래 애교가 많은 게 아니라 애정이 많다. 요는, 좋아하는 전쟁영화라도 보면서 눈물을 빼지 않으면 나는 울 일이 없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팔자가 늘어진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나는 항상 ‘더 베풀어도 되는 사람’이 되어 있다. 그게 별로 유쾌하진 않으니, 혼자를 선택하는 날이 많아졌다.

인터넷 쇼핑을 좋아한다곤 했지만, 얼마 전부터는 최소한의 생필품만 산다. 내심 기다리던 택배가 오면 반가워서 기사 아저씨에게 현관 폰으로 인사를 열심히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바빠서 집에 없는 척 하면, 안 가고 서 있는 것을 자주 본다. 길고양이를 보고 들어오는 어두컴컴한 길에 차를 대놓고 있다가 불쑥 인사를 하는 일도 있었고, 한 번은 친척이 와서 현관 폰을 받았는데 그 후에 누가 같이 사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악의는 없었겠지만, 혼자 살다보면 순간 간이 작아질 때가 있다.

그래도, 여기 온 후로 혼밥, 혼차, 혼술이 너무 즐겁다. 물론 혼자 사냐고 놀란 투로 묻는 사람도 있기는 했다. 다 큰 자식이 있는 아주머니였는데, 파고들 것 같아서 미리 철벽을 쳤다. 그 다음에 마주쳐서 예쁘다고 칭찬해주실 때를 기다렸다가, 무신경한 표정으로 “아, 네”로 응수했다. 이젠 말을 쉽게 안 건다.

사실 맘에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고, 원래 좀 감흥이 없다. 내 얼굴은 아빠 얼굴이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시간을 들여 얻은 것은 남들이 종종 고상하다고 하는 내 “취향” 뿐이다. 집도 물론 아버지 소유다.

어디 싸우러 나가서 영웅이 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문학적 소질이 있어서 예술가 행세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학점이 목적인 학생들 가르치기도 싫어서, 취업하려는 시도 역시 하지 않았다. 읽는 책과 보는 영화, 듣는 음악을 제외하면, 내 삶은 저탄수화물 식단과 자가 모공 관리, 자유롭다는 만족감, 그뿐일지도 모른다. 제 아무리 깊은 영혼일지라도 얕은 생활에 젖어 살게 마련이다. 종종 하는 표현인데, 이것 역시 인간의 condition(조건이자 상태)이다.

간밤에는 익숙한 류의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어쩌면 이틀 전 밤이었을 수도 있겠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결혼을 앞두었지만 밝히고 싶지는 않은, 그렇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던 친구의 전화'. 용건도 없는 듯 하면서 끊지도 않는 이런 전화는 주로 자유를 잃기 직전의 누군가가 거는 것이다.

예전에 너무 친한 친구가 이랬을 때, 뭔가 아까워서 그런 망상도 해봤다. 영화 ‘졸업’처럼, 손을 잡고 도망가자고 말하는 거다.

그러나 도망가는 것까지만 재미있을 것이다. 내가 또 그렇게 가벼운 사람이다. 그래서 그냥 장난기를 누르고 날짜는 잡았냐고 대뜸 물어본다. 당황해하는 데서 재미를 찾는다. 진짜로 깔깔 웃는다.

누군가가 자유를 잃기 전에 생각나는 게 나라는 느낌은 그리 나쁘지 않다. 뭔가 비겁한 것 같지만 나는 적당하거나 먼 거리에서 봐서 무조건 반짝거릴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로 남고 말겠다.

일기: 나 혼자 산다는 2018년 4월 29일자 글로, [오마주] 프로젝트로 재발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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