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27. 나의 시선

나는 화장을 잘 하지 않는다. 가볍게 화장을 시작한 것은 당시에는 조금 일렀던 중 3 때였는데, 같이 학원 다니던 친구를 따라 파우더와 립글로스를 바르고 갈색의 펜슬 아이라이너로 눈매를 조금 더 또렷하게 그리고 다녔다. 채팅이 유행했던 고등학생 때는 주말마다 친구들과 번개팅을 했는데 친구의 성화로 매번 화장을 하긴 했지만, 처음에 느꼈던 일탈감은 온데간데없이 화장하고 지우는 자체가 귀찮게 느껴졌다. 그래서 남들이 화장을 시작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는 오히려 맨얼굴로 다녔다. 화장을 즐겨 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시력 때문인데, 양쪽 눈 모두 -5.5 디옵터라 화장을 해봤자 안경을 끼고 나면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 그래서 화장을 할 때에는 1회용 렌즈를 이용하는데, 렌즈를 낀 눈으로 하루 종일 컴퓨터를 바라보는 것은 무리라 회사에 다닐 때도 거의 맨얼굴로 다녔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 화장을 하고 가는 날은 타 부서, 업체와의 회의가 있을 때 또는 저녁에 술 약속이 있는 날 뿐이어서, 화장한 날은 따로 알리지 않아도 내가 일찍 퇴근할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예상하곤 했다.

나는 바지보다 치마를, 파스텔톤보다는 원색 옷을, 그리고 깔끔한 디자인의 가방을 좋아한다. 하지만 가지고 있던 옷 대부분이 짧은 원피스라 이곳에선 입을 수가 없고, 이곳에서 파는 원피스도 대부분 짧아 새로 사는 것도 쉽지 않다. 한국에서도 긴 원피스를 파는 곳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는데, 운 좋게도 친구들과의 작별 인사를위해 갔던 이태원의 어딘가에서 발목까지 오는 에스닉 원피스를 몇 장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옷들은 내 가방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이곳에 온 이후로는 중저가 브랜드의 끈이 얇은 가죽 크로스백 하나만을 주로 메고 다닌다.

결국 나는 특별히 데이트를 하거나 누군가와 약속이 없는 이상 화장도 하지 않고, 긴 면 원피스 차림에, 소위 말하는 명품이 아닌 가방을 메고 다닌다는 것인데, 편하긴 하지만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불쾌할 때가 종종 있다. 그 한 예는 슈퍼로, 이곳의 슈퍼는 물건 계산 후에 봉지에 담는 것을 담당하는 직원이 따로 있다. 하지만 담당 직원의 수가 카운터 수 보다 적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그들은 구매하는 물건의 양과 상관없이 돈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줄 서있는 곳으로 교묘하게 옮겨간다. 이곳에는 중국, 필리핀 등에서 온 메이드가 많아, 있어 보이는 뭐 하나라도 걸치지 않는 한 나도 그들 중 하나로 취급되어 내가 서있는 카운터에 담당 직원이 없는 일이 발생하곤 하는데 그 상황이 싫어서 한때는 슈퍼에 갈 때마다 메이드가 아님을 보이기 위해 요가복을 입고 다니기도 했지만, 대체 동네 슈퍼에 가면서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그만뒀다. 내가 잘 차려입고 다닌다면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지만, 직원이 있는 곳에 서 있는 서양인을 보면 그들도 편한 옷차림에 맨얼굴이긴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애초에 상대방의 직업이 무엇이던, 재산이 많고 적든 간에 똑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바뀔 것 같지도 않고, 나도 슈퍼에 꾸미고 나갈 마음이 없으니 다음부턴 신경 써서 서양인 뒤에 줄을 서야겠다. 설마 바로 앞까지 있었던 사람이 내 차례가 되자마자 사라지진 않겠지.

한국에서 일할 땐 어차피 모두가 비슷한 월급을 받았기에 지닌 물건으로 서로를 판단하거나, 비싼 물건을 자랑하는 일이 없었고, 남의 시선을 위해 무언가를 가져야 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 문화가 더욱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다음 주엔 결혼기념일이 있지만 딱히 사고 싶은 게 없다. 가방과 구두에 대한 욕심은 어느 정도 선에서 멈췄고, 목걸이는 걸고 푸는 게 귀찮아서 잘 하지 않으며, 반지는 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지만, 내가 봐뒀던 그 제품은 결혼하던 당시에 결혼 10주년 선물로 찜해둔 것이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남편과 맛있는 것을 먹고, 고양이랑 쉬고, 원하는 책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지금의 생활이 오래 지속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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