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없는 일상이 무료하다. 이대로 안 되겠다 싶을 때쯤 예외 없이 그 녀석이 불쑥 찾아온다.
또 다른 나 '제3의 자아'. 나만 믿으라며 자신 있게 그 녀석은 어제 나의 뇌와 몸을 채갔다.
나의 뿌리 깊은 집순이 DNA를 격파하고 저질스러운 체력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무한 체력으로 나를 세팅하고 꿈인 듯 환각인 듯 무한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마약 같은 그 녀석. 녀석과 함께라면 나는 마치 내일이 없을 것 같은 스릴을 맛보기도 하고 다신 없을 특별한 추억을 선물로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별의 후유증이 꽤나 어마어마한 녀석이다. 녀석과 헤어진 후 나의 에너지는 모조리 방전되어 며칠을 앓아누울 수도 있고 반대급부로 더 오랜 동면을 취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녀석은 아주 가끔씩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온다.
그 녀석의 풀네임은 '일내 보자 내일은 없이 오늘만 산다'이다. 충동과 기분만으로 구성된 자아로 내가 미친 짓을 할 때는 늘 녀석이 함께 있었다. 평소 소심한 주인이 하지 못할 일을 실제로 이루어지는 지니이기도 하다. 생각하기만 하면 냅다 저질러버리는 행동파, 다만 흥이 이어질 때까지 작동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즉 녀석이 언제 변덕을 부리고 떠날 지 아무도 모른다.
어제 녀석을 등에 업고 나는 아주 가끔 머리로만 생각했던 일을 저질러보기로 했다. '저랑 커피 한 잔 하실래요?'라는 삼류 마케팅 같은 제목으로 포스팅을 막힘 없이 적어 내려갔다. 사실 글을 다 쓰고도 5분 정도 고민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밀려들었고 '글 올리기' 버튼을 눌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급만남 커피 밋업은 시작되었다.
'될 일은 된다.'라는 책을 좋아한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내 판단, 두려움, 의심, 인색함을 내려놓고 스팀잇을 도구로 우주에 나 자신을 맡겨보고자 했다. 우주신이 다 해결해주실 거라는 마음으로 그냥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밋업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나 자신이 기획한 건 아무것도 없다. 누구를 만날지 어디서 만날지 '우연' 혹은 '인연' 내 기준에서는 우주의 신님이 점지해주실 거다.
라고는 말했지만 사실 포스팅이 올라가고 30분까지도 쫄보인 내 심장은 '역시 아무도 없을지도 몰라. 괜찮아. 그렇다면 혼자서 카페 순회나 하지 뭐. 아하하하핫'하며 열심히 위로를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생각보다 날 만나겠다는 분들이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내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걔 중엔 글을 올릴 때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과연 어떻게 될지 감도 오지 않는다.
이상한 사람 아니라고 부담 없이 나오라고 했지만 사실 누군가를 시간 내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부담되는 일이다. 친구를 만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바쁘고 각박하고 여유 없는 사회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준다는 사실이 너무 놀랍고 기적과도 같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시간을 내주시나. 길 가는 사람 붙잡고 '저랑 커피 한 잔 하실래요?'라고 말을 걸면 얼마나 싸늘한 시선을 받을지 상상만 해도 뻘쭘하고 민망하다. 그런데 여기 스팀잇에서는 이런 짓을 해도 받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놀랍다.
(찬양애정하라 스팀잇)
어쩌면 생각했던 것과 다를지도 모른다. 불안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사실 벌써 피곤하다. 나 같은 집순이가 4일 내내 바깥나들이라니! 그것도 퇴근 후에! 그러나 난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진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러니 이 풍요를 즐기자고! 왠지 삶이 더 재밌어질 것 같아.
-2019년 1월 16일 오후에 작성.
급만남커피밋업 시리즈
#1 실은 제가 그런 게 아니랍니다.
#2 히든 밋업; 인생 첫 스팀잇 밋업
#3 비일상적 두 번째 밋업; 작가와의 만남
#4 진정한 랜덤 밋업; 뜻밖의 지적 대화
#5 마지막밋업; 우리 오늘 처음 본 거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