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런던 대영박물관 다녀왔다. 하루종일 봤다. 오늘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눈과 뇌가 과부하가 일었다. 너무 많이 보면 뭘 봤는지 까먹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대영박물관을 다녀왔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울만큼 그 방대한 전시물들 앞에서 헤매이기만 했으며 수많은 인파들에게 부대끼며 대략 눈을 스치고 왔다-라는 정도의 표현이 적당할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대영박물관의 인증샷으로는 이 사진이 지금 나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설령 전시물 하나하나를 다 이해하지 못하고 스쳤다 하더라도, 작품의 원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된 방식으로 관람을 했다 하더라도, 그래도, 어떤 것에도 '첫인상'은 항상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라고 스스로 겨우 위로하며 글을 시작한다.
아즈텍,아시리아,이집트,그리스,마야,아프리카 등등 수많은 문명의 예술품들을 보았다. 각 문명들에 대해 난 문외한이지만 거의 모든 예술품들이 내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경탄하게 만들었으며 때로는 그 익살스러움에 웃음짓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정말 존경과 숭고의 존재로 다가왔다. 오디오가이드를 귀에 꽂고 다니긴 했지만 이렇게나 멍청한 상태로 이 엄청난 예술품들을 본다는 것 자체에 일종의 도덕적인 죄책감이 들었다.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예술품의 조형은 그 문명을 대변한다. 역시 당연한 것이지만 다들 각자의 독특한 조형세계를 구축해 왔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리고 만약 예술품으로만 기준을 놓고 지구에서 태어난 문명들의 수준을 결정한다면 동시대 예술이 결코 상위랭크에 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몇천년 전 사람들이 만든 것들은 정말 대단했다.
대영박물관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역시 판테온 신전을 재현해놓은 그리스 전시실이었다. 그리스의 인체 조각상들은 정말 아름다웠다. 심지어 그리스 조각은 대부분이 잘려나가고 아주 부분만 남은 것이라도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다.
세월을 거치며 원본의 모습이 손상되어 잘려나가고 부서진 것 앞에서 '이것이 만약 잘 보존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느낌이 들긴 하지만 부서진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상상이란 것은 위대한 것을 더 위대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판테온 신전은 부서진 잔해들로 하여금 더욱 더 위대해지고 있었다.
그리스 조각들은 원래 하얀색이 아니라 색칠된 것이라는 다큐를 본 적이 있는데, 화려한 색으로 칠해진 판테온신전 눈 앞의 조각상들을 잠시 상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세계각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인증샷 배경으로 전락해버린 이 대영박물관 속 미술품들 중 몇몇들은 아마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미적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감히 맘놓고 쳐다보지도 못할 무시무시한 숭고와 공포의 존재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런 예술품들이 이렇게 옛 영광을 잃고, 단지 형상의 아름다움 때문에 현대인에게 단지 몇 초를 할애하는 인스타그램 배경으로 전락하여 조롱당하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씁쓸하기도 했다.
대영박물관을 나오며 무지한 내 머리를 또 한번 자책했다. 좀 더 박식했더라면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세계사 공부를 한 번 해볼까... 하는, 내일이면 까먹을 일회용 다짐을 하고 말았다.
@thelump
화가의 여행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