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품 천지인 유럽, 그리고 파리에 와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혼자 다니기 때문에 저녁에는 간혹 외로울 때가 있지만, 보통 뮤지엄이 닫히는 오후 6시까지는 혼자여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 순간만큼은 혼자여서 좋다.
실제로 여행지에서 사람을 만나보면 미술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많다. 물론 사람마다 여행의 목적은 다르다. 여행은 어떤 의무도 없으며 본인이 즐거우면 장땡이다. 모르는 거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는 투덜대고 싶다. 유럽 와서 미술에 관심이 없다면, 도대체 그들은 여기에서 무얼 한단 말인가!!?
눈 뜨자마자 도착한 곳은 로댕 미술관. 역시 줄이 많이 서 있다.
예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로댕 특별전을 보고 느꼈지만 역시 로댕의 조각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생성의 미학'이다. 미켈란젤로가 석재를 보면 그 안에 갇혀있는 형상을 발견하고 필요없는 부분만 깎아 조각을 한다는 그의 천재적인 작업 프로세스를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반면 로댕의 조각은 돌에서 형상들이 스스로 솟아오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솟아오르는 과정'을 목격하는 듯 하다. 마치 작품이 탄생되는 은밀한 비밀의 현장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쾌감이 드는데, 물론 작품은 그 자체로도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

로댕은 조각하지 않은 돌의 부분들 역시 작품의 일부분으로 그대로 남겨놓았는데 그것조차 조형적인 요소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담당하고 있었다.
전시품 중에는 대리석으로 본 작업을 들어가기 전에 석고로 드로잉처럼 작게 만든 작업이 있었는데, 난 오히려 그것들이 마음에 쏙 들었다. 정말 하나 갖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날 정도로. 저거 하나 작업실에 갖다놓으면 영감이 마구마구 떠오를 것만 같다. 사실 조각의 역사나 지식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이지만 로댕과 자코메티의 조각만큼은 그것이 왜 훌륭한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파리의 로댕 미술관은 앞 공원에 야외전시장이 따로 있는데 전시장 안에서 그의 작품을 보는 것보다는 역시 자연 속에서 보는 것이 더 멋있었다.
늦은 오후에는, 릴렉스하고 여유로운 파리의 풍경처럼이나 느릿느릿 좀처럼 저물 생각을 안하는 한여름의 따사로운 태양빛을 받으며 세느강 가를 거닐었다.
서울처럼 모두가 바빠보이는 런던보다는 역시 파리가 더 도시의 여유가 넘쳤으며 '낭만' 같은 단어들이 이곳저곳 어울리는 예쁜 공간들이 많았다. 에든버러에서 만났던 사람을 파리에서 만나 같이 걸었다. 파리는 혼자 걷는 것보다는 누군가와 같이 이야기하며 걷기에 가장 좋은 도시다.
세느강은 파리의 중심을 흐르고 있고, 누가 생각해도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강 주위는 노점상들에겐 가장 장사가 잘 되는 상권일 것이다. 그런데 세느강을 따라 주욱 늘어선 대로변의 노점상들은 열쇠고리나 에펠탑 모형같은 관광상품을 파는 곳이 아닌, 모두가 다 중고책을 파는 곳이었다.
상인들은 철저히 시장논리에 따라 움직일 터인데 이렇게 중고책 노점상들이 도시 한복판에 활개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장사가 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 광경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과 미국에서는 잘 볼 수 없었지만 유럽에서는 유난히 도시 속에서 잔디나 벤치에 앉아 홀로 독서하는 사람들이 많다.
강가를 가다가 또 재미난 광경을 보았는데, 강 바로 옆 둔치에 조그마한 무대에서는 음악이 흐르고 파리 시민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노인이었고 부부커플이었는데, 찰떡같은 호흡과 딱딱 들어맞는 스탭은 그들이 젊었을 적부터 지금까지의 함께한 세월의 흔적을, 오래된 포도주처럼 무르익은 그들의 파트너쉽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었다.

저녁에는 세느강의 유람선, 바토무슈를 탔다. 탑승 시간이 가까워지자 선착장 앞은 어디선가 관광버스들이 들어와 하나 둘 사람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한국인들 이었다. 유람선 안은 한국인 천지였다.
유람선이 출발하자마자 사람들은 누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정말 미친듯이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나는 일종의 청개구리 기질이 생겨 절대로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그래, 니네들이 카메라에 정신팔려 있을동안 난 내 두 눈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직접 풍경들을 담아내겠어.." 하며 홀로 음악을 들으며 바람 휘날리는 곳에 잔뜩 폼 잡고 앉아서 해질녘 풍경을 만끽했다.
바로 그때였다. 배가 한바퀴 돌아 다시 시작점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마침 도시의 건물들은 하나 둘 조명을 쏘아올렸고 저 멀리 반짝이는 에펠탑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할 때였다.

분명 카메라를 미친듯이 찍어대는 여행객들을 비웃듯 앉아 있는 나였는데.. 내 두 눈으로 풍경을 담겼다고 다짐한 나였는데.. 야경의 에펠탑이 나타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스마트폰이고 dslr이고 정신없이 바꿔가며 미친듯이 수십 번의 셔터를 눌러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 어쩔수 없지 뭐.. 나도 파리에 처음 온 한갓 관광객일 뿐이네.. 역시 찍는게 남는거야! 아하하하!! .... 누구나 다 찍는 에펠탑의 야경이지만, 정말 아름답고 멋있었다.
파리에 와서 에펠탑을 보고 루브르를 가고 세느강 유람선을 타긴 했지만 가끔 생각하면 내가 진정 파리에 있는 것이 맞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단지 허상은 아닐까. '실감이 안 난다'라는 표현보다는 뭐랄까.. 떠도는 여행자로서는 어쩔 수 없이 타지에서 느끼는 존재론적인 공허함이라고 해야되나.
홀로 미술관을 거닐고 성당을 다니고 이곳저곳 명소들을 가고는 있지만 마치 유령이나 투명인간이 되어 도시를 배회하는 것만 같다.
@thel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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