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에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어울리는 사진
-- 보통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안티로맨틱 성향이란 어둡거나 비관적이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컵케익과 닮았 그러니 이렇게 쾌청한 날씨에 맞는 안티로맨틱 수기를 써보기로.
-- (오페라를 특히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니진 않지만) 그래도 살면서 가장 오래, 그리고 많이 들은 음악 장르인 클래식 중에서도 오페라를 많이 듣는 편이기는 한데, 이렇게 쾌청한 날에 유독 떠오르는 아리아는 '뮤제타의 왈츠'다. 평소에는 거의 듣지 않는 곡이다. 오페라계의 멜로디킹 쟈코모 푸치니 작품이니 굳이 곡 자체가 싫을 이유는 없지만서도, 그걸 소화하는 대부분의 소프라노들은 너무 소리가 가늘고 높아서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다.
-- 맑고 쾌청한 날씨와 '뮤제타의 왈츠'를 결부시키는 이유는 모파상의 한 단편에 이 곡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 '봄날에(In the Spring)'라는 제목인데, 물론 배경은 화창한 봄이다. 배를 타고 들떠 있는 파리지앵 중에는 한 젊은 남자가 있다. 한 중년 남자가 그에게 접근해 와, 뜬금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설정이다. 중년 남자는 바로 그날과 같은 날씨에, 같은 배를 타고 봄날을 즐기는 와중에 한 젊은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그와 함꼐 숲속에서 산책하며 '뮤제타의 왈츠'를 불렀고, 그때 그 노래는 너무나도 시적으로 들렸다고 한다.
-- 소설 현재 시점의 중년 남자는 이제, 고성으로 '뮤제타의 왈츠'를 불러대며 밤낮으로 바가지를 긁게 된 그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 중년 남자는 젊은 남자가 배 위의 한 아가씨에게 눈을 뺏긴 것을 보고는, 따라 내리려는 그를 처절하게 붙잡는다. 위험에 빠진 인간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안 돼, 따라 내려선 안 돼!" 전형적인 모파상 식의 서사. 그 단편이나 '뮤제타의 왈츠'나, 떠올리면 피식 웃게 된다.
-- 사실 선곡도 우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페라 라 보엠에서 뮤제타는 옛 연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낯선 남자들 사이에서 거의 망신 급의 눈요기를 자처하는데, 그때 부르는 노래가 '뮤제타의 왈츠'이다.
-- 모파상은 주로 여성을 일종의 빠져서는 안 되는 함정으로 그리곤 했다. 여성 혐오를 논하기보다는 그를 안티로맨틱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회의와 좌절을 그리기보다는 자조와 유쾌함이 넘치는 글을 썼다. 영원히 함께 하길 선언하는 삼단 케익 정도의 달콤함은 있지만, 그걸 작은 용기에 담아낸 컵케익과도 같은 글.
-- 로맨스를 아예 느끼지 못하는 에이로맨틱(Aromantic) 대신에 안티로맨틱(Anti-romantic)을 자처하는 이유를 한번쯤은 다룬 적이 있다. 아마 전자가 무슨 기능 결핍으로 보이는 반면 후자는 보다 능동적인 선택인 것 같다느니 뭐라느니 하고 지껄였던 것 같은데, 그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라는 생각이 오늘 문득 들었다. 안티로맨틱이란 로맨스에서 가장 언로맨틱(unromantic)한 부분을 선호하는 사람이 아닐까. 어쨌든 나는 그런 것 같다.
-- 나는 헤어지는 것을 그 자체로 좋아한다.
-- 무엇이 로맨틱하다, 언로맨틱하다에 대한 시각 차이는 분명히 있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리고 보는 이에 따라서는 이별도 로맨틱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언로맨틱함"의 기준은 로맨스의 상대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이별이야말로 가장 언로맨틱한 사건이라 할 수 있겠지.
-- 예전에 한번 기록했듯이, 어릴 적에 처음으로 같이 영화를 보러 간 몇 살 위의 학생이 있었다. 그는 유럽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볼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쪽은 계속 연락을 하면서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할만큼 순진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사람이 그 나이대에서는 처음 접하는 한국인이라 궁금했을 뿐, 이성으로서의 관심은 딱히 없었고 따라서 일부러 연락을 지속할 생각도 없었다. 해도 안 해도 그만이긴 했지만, 계속 연락하자고 우물쭈물 말하는 사람을 보고 있자니, 뭔가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그래서 떠오르는 생각을 너무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나는 그냥 깔끔하게 헤어지는 걸 좋아한다'고. 상대방은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뭔가 정리정돈을 한 것 같은 기분에 빠졌다. 당시에는 그냥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게는 원래 그런 성향이 있었다. 외국에서 같이 자라난 아이들과 헤어질 때도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그 중에는 지지난 회차에서 이야기했던, 10대 시절의 "사랑"이었던 애도 있었지만, 그저 시원한 마음뿐이었다.
-- 만남 이상으로 헤어짐이 중요하다, 배려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만나면서부터 헤어짐을 준비해야 한다 등등의 감상적인 이야기는 많은데, 나처럼 이별 자체가 좋은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 물론 아무런 감흥을 남기지 않는 만남 이후의 이별은 의미가 없다. 무언가 이제 헤어져도 되겠다고 "만족"하는 시점이 있다. 무언가 결핍을 느껴서 헤어지는 것과는 반대이기 때문에, "왜 헤어졌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애매모호하게 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헤어지고 난 후에 더 따뜻하고 좋은 감정이 생겨나곤 했다. 물론 다시 이어지는 데 필요한 류의 좋은 감정은 아니지만...
-- "이별 전에 도달해야 하는 만족점"이란 아무리 내가 미화하려 해도, "뭔가 듣고 싶은 말" "보고 싶은 행동" 정도로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 이상 끌면 내가 원하는 거리에서 더 좁혀질까봐 두려운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원하는 걸 얻어냈다는 기쁨과 함께 빨리 떠나버리고 싶어진다.
-- 그 "이별 전 만족점"이 가장 늦게 온 사람의 경우, 그 사람과 만나는 동안 나는 페넬로페 컴플렉스 환자가 되었다. 물론 페넬로페 컴플렉스는 내가 지어낸 개념인데, 그 자체가 상당히 만족스러운 경험이어서 아마도 이별을 늦게 택했던 것 같다. (그와는 많은 우연이 겹쳐서 '운명'처럼 여겨지는 시작이 있었기 때문에 착각할 뻔도 했는데, 그 이야기는 조만간 다음 회차에 이어서 하기로...)
-- 페넬로페는 이타케의 왕 오딧세우스(율리시즈)의 아내로, 그가 트로이 전쟁에 출전 후 긴 방랑을 하며 집에 돌아오기까지 그를 기다린 여자다. 지고지순함의 대명사 같지만, 내 시각은 조금 다르다.
-- 페넬로페는 그쪽 세계에서는 "최고의 남자" 였던 오딧세우스를 멀리 떠나보내고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청순한 여주인공이자 이타케를 차지하려면 얻어야 하는 여자가 되었다. 구혼자들이 몰려들었지만 그들을 거부할 정당한 이유가 항상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가버리지도 않았다.
-- 그러는 동안 오딧세우스는 키르케라는 인어의 마법에 홀려서 오랫 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오딧세우스는 집을 그리워하면서도, 발이 묶인 상태였다.
-- 영화 율리시즈 1948년 작에서는 실바나 망가노라는 한 명의 여배우가 페넬로페와 키르케를 둘 다 연기한다. 마치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오데뜨와 오딜 역할을 한 명의 발레리나가 다 소화하듯이.
키르케 아니 어쩌면 페넬로페로 분한 실바나 망가노
-- 영화는 왜 굳이 대조적인 페넬로페와 키르케라는 두 역할을 한 배우에게 맡겼을까?
-- 신화는 역사적 찌꺼기로 만들어낸 현실의 비유라고 생각한다. 정절을 지키며 그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내, 마법처럼 꼼짝 못하게 하는 요부. 양쪽 다 "영웅"이 추구하는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그냥 전형적으로.
-- 내 "오딧세우스"는 매우 바빴다. 성공에 대한 강박증은 나이에도 맞지 않게 크고 많은 일들을 짊어지도록 했다. 나는 페넬로페처럼 행동했고 전혀 자신을 키르케처럼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항상 그를 차지한 것처럼 느꼈다. 그 사람을 이해한다고 느낀 시점부터, 한 번도 불안해하거나 의심한 적이 없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에서 오는 자신감이라는 것이 그렇게 큰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진짜로 페넬로페적인 인물이 되면 그 동안만큼은 키르케 역시 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그가 어느 정도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어서 자주 옆에 있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 시점에 나는 떠났다.
-- 자주 만나기가 싫거나 질린 것만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이별에 필요한 만족점"을 획득한 후에야 헤어지고 싶어지는데, 그가 소위 "나쁜 남자"에서 변하면서 그 만족점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일에 파묻혀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변화 자체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걸린 여정이었다.
-- 당시에는 헤어진 이유를 묻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초기와 달리 내게 심적으로 의존하게 된 모습이 싫어서 헤어졌다고 말했고 그것도 거짓은 아니었다. '아, 이제야 내게 의존하는구나' 느낀 그 첫 순간이 내게는 "이별에 필요한 만족점"이었다. 물론 눈물 나게 미안했다.
-- 그 순간은 비록 힘들게 획득했지만 가장 뿌듯한 경험은 아니었다. "이별 전의 만족점"은 자연스레 와야 하고 또 오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인위적으로 얻어내기 위해 애쓰는 것엔 아무런 재미가 없다. 그런데 오기로 약간은 노력한 것 같다. 재미 없었다.
-- 이별의 조건을 충족하는 만족점이 매번 무엇이 될지는 나도 잘 모른다. 와봐야 아는 것이다. 그래서 다소 뻔한 모습의 만족점이란 마치 먹고 나서 배는 부른데 그다지 맛있다고 느끼지는 못한 음식과도 같다. 예상을 깨는 형태의 만족점이 무조건 더 좋은 것이다.
--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선 만족점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되면 별 것이 아니게 되기도 한다.
-- 관계 자체에서 만족을 찾아야 하는데, 왜 떠나기 위한 만족점을 찾는지 그 근원에 대해선 나도 모른다. 왜 파릇파릇한 감정 이후는 보고 싶지 않아 하고, 내 눈에 반짝거려 보이는, 상대방의 감정이 고조되었다는 증거를 하나쯤 갖고 도망가고 싶은지에 대해선 모르겠다. 까마귀인가?
-- 굳이 근원을 찾아보자면,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 있었던 점", "모유를 먹지 않은 점" 외엔 떠오르지 않는다. 반은 진담이다.
-- 바뀔 수 있다 해도 바꾸고 싶진 않은데, 그 이유는 이 상태가 특별히 좋아서라기보다는, 안티로맨틱 성향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컵케익 같은 즐거움이 거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예기치 못했고 따라서 내 눈에 특히 반짝반짝하는 "만족점" 하나를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살짝 공개해본다. 그것은 단 한 마디의 말이었는데, 지금도 자신이 유치하게 느껴지지만 낄낄 웃게 해준다. 그 사람은 한국에서도 서열 강한 것으로 꼽히는 집단의 일원이었는데, 개인적으로도 특히 순진하고 보수적인 타입이었다. 그런 사람이 나와 한바탕 싸움 끝에, "나는 대한민국 OO가 아니라 OOO(내 이름) OO야"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 진짜 내 자신이 짜증나지만ㅋㅋ그 말은 너무도 만족스러웠고, 멀지 않아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만족점이 특이했어서인지 지금도 가장 좋아했던 감정이 컸던 상대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 사람에 대해선 과연 쓸 수 있을려나 모르겠다.
로맨틱, 안티로맨틱은 각각 로맨틱한 사람, 안티로맨틱한 사람이란 뜻의 명사이다. 편의상 줄여서 그렇게 쓴 것이 아니라, 실제로 로맨틱 자체가 형용사이기 이전에 명사이다.
덤으로, 로맨티스트는 잘못된 표기이며, 로맨티시스트가 맞다. 그런데 로맨티시스트는 사조로서의 낭만주의를 표방하는 낭만주의자로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는 로맨틱, 안티로맨틱을 택해서 쓰고 있다.
지난 회차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1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2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3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4